믿음의 글과 자료

믿음의 글/자료 게시판은 이 시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현대 기독교와 교회의 모습, 창조주 하나님과 그 분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게시판입니다. 특히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으로 우리의 주가 되시는지 그 표적인 부활의 역사적 증거 자료와 함께 흔들릴 수 없는 부활신앙에 서도록 격려하고 북돋우는 도움의 글들을 올리고 있습니다. 교우들의 많은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Title한국교회의 지금, 그리고 부흥을 위한 개혁 - 32012-06-10 22: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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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지금, 그리고 부흥을 위한 개혁 - 3  
신-샌디매니어니즘 (neo-Sandemanianism)이 현대 교회에 미친 영향 (상)
 

 
북한사랑 PN4N 2010년 10월호  
글: PN4N 편집부

 
들어가면서 

복음 전도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합니다.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사 55:7) 복음 전도자의 책무는 그의 청중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병기를 버리도록 요구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긍휼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의 길에 대한 정의가 잘못 내려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현대의 \'복음 전도자\'들은 죄인이 지옥을 면하며 확실히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회중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가져야 할 의무는 오늘날의 \'복음주의\' 괴물과 아무 관계도 갖지 않으며, 이들에 대한 모든 도덕적·재정적 지원을 보류하고, 그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며, 그들의 소책자를 배포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더 핑크) 

아더 핑크(Arthur Pink, 1886~1952)는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미국과 호주를 돌면서 목회하였고, 스코틀랜드의 그 유명한 부흥의 땅, 루이스 섬(Isle of Lewis, 헤브리디스 제도의 가장 큰 섬으로서, 1949~1953년 사이에 일어난 헤브리디스 부흥으로 유명하다)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아더 핑크는 약 100여 년 전의 사람이지만, 위에 인용된 그의 글은 이번 호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요지를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사영리 및 이와 유사한 방법에 의한 전도법과 설교를 통하여 한국교회와 캠퍼스 및 선교 단체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영접 기도를 통한 구원 제시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고 우리의 옛 믿음의 선조들이 이해했던 믿음을 통한 구원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찰하고자 합니다. 이것을 다시 다루어야만 하는 이유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비성경적 전도 방법의 오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해는 하지만 개혁의 필요성에 대하여 눈뜨고 있지 못하며, 오류를 알고는 있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다거나 단지 사용하지 않으면 된다는 정도의 소극적 태도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집요하게 영접 기도문 읽기식 결단주의적 전도 방법의 폐해를 파헤쳐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20세기의 위대한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가 그의 책 <부흥>(1859년 영국 전역에서 일어난 부흥의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1959년 로이드 존스 목사가 부흥을 주제로 연속 설교한 24편의 설교 모음집)에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옛 우물들에서 물을 얻고자 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쓰레기들로 막아 버린 것을 언급하면서, 물을 다시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쓰레기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불가능함을 역설하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던 옛 부흥이 오늘날 도무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블레셋 사람들의 고약한 쓰레기가 막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을 발견하고 파헤쳐서 내다 던지지 않으면 부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얘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가 중요하게 언급한 것은 무엇입니까. 부흥의 때에 예외 없이 빠지지 않은 것은 바로, 구원의 교리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가르침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교리를 매우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그 무엇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한국교회와 캠퍼스와 선교 단체를 완전히 뒤덮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영생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한국교회의 전체적인 부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교리들을 효과적으로 흩어 놓고 부흥의 우물을 막아 버린 그 쓰레기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에 대해서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몇 가지를 명확히 해 두어야겠습니다. 

첫째, 여기의 글들은 어떤 사람이나 단체에 대한 비난과 조소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순수한 의도와 열정, 그리고 모든 기도와 성경 연구, 또한 모든 조직과 훈련과 운동들은 모든 사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 오셨음을 이해합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전도 방법에 있어서의 심각한 오류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미묘한 차이가 결국에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지, 또한 수십 년간 확고하게 한국교회 대부분과 선교 단체의 대부분을 장악해 버린 이 영접 기도문 읽기식 전도 방법이, 오늘날 교회와 캠퍼스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진지하게 자문함에 이 글의 목적이 있습니다. 

셋째, 이 글의 최종적인 목적은, 영접 기도문 읽기식 전도 방법을 버리고 대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며, 이것을 통하여 구원의 교리들이 교회 안에서 다시 살아나도록 충격을 가하여, 다시금 한국교회의 전체적인 부흥이 일어나는 일에 기여하고, 이것을 통하여 통일을 준비하는 일에 한국교회가 전체적으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넷째, 따라서 교회와 신학교와 선교 단체들의 인도자들은 아래의 글을 주의 깊게 읽을 뿐만 아니라 과연 그러한지 고찰하고, 반드시 개혁해야만 한다는 현실이 눈앞에서 인식될 때에는, 실제적인 개혁에 동참함으로 부흥의 길을 예비할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달콤한 하나님 

"진리 전체를 전하지 않고 일부를 빼버린 채 전하는 것이 오늘날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강조하고 십자가에 대해 많은 말을 할지라도, 성경과 십자가에 관해서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 주목해 봐야 합니다. 무엇을 말하는 사실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설교자가 말하는 것뿐 아니라 말하지 않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 마틴 로이드 존스의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복 있는 사람) 

큰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서 얘기할 뿐 죄에 대하여 얘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얘기할 뿐, 진노에 대해서는 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 얘기하지만, 심판에 대해서는 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얘기할 뿐, 공의에 대해서는 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의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얘기하지만, 공의의 충족이란 면은 숨겨버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부인해 왔습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달콤한 하나님으로 대체해 버렸습니다. 분명, 달콤한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며, 우리가 믿어야 하는 한 분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일 뿐입니다. 

어떻게 이 우상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까. 온갖 종류의 활동들과 안락을 추구하는 문화들이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진리를 찾는 일을 막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혹은 필요한 것을 얻어 내기 위한 마술 책이나 우리의 종교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한 장식으로만 간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알기 위해서 성경을 총괄적으로 읽지 않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세상에 비추기 위한 최고의 기준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지속적이며 총괄적인 성경 읽기, 건전한 교리들의 가르침과 그것들의 성경적인 이해는 현대의 기독교인의 삶과 사역에서는 선택 사항일 뿐 필수 사항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달콤한 하나님을 가지고 있고, 우리 자신의 다양한 기술과 방법들도 가지고 있으며, 이런 것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그분의 말씀하심으로부터 우리의 눈과 귀를 닫아 버리는 분주함이나 세속적인 책과 미디어들과 같은 방해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싸우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의 교제와 설교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나누는 일이 무척 희귀한 것이 되었습니다. 비록 진정한 교제와 설교는 바로 그것인데도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빛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리(진리의 빛), 즉 성경의 복음이 쇠퇴해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면 어떤 설명이 가능하겠습니까. 

 
사영리는 신-샌디매니어니즘 (neo-Sandemanianism) 

게다가 종교적인 변형체인 \'사영리\'는 우리에게는 친숙한 것이 되었는데, 실상은 달콤한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일에 크게 공헌해 왔습니다. 이 변형체는 자신을 성경 구절들로 감싸고 있으면서, 자신의 핵심적인 잘못된 가르침 안으로 사람들을 유인해 내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이 잘못된 방법은 요즘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샌디매니어니즘 (Sandemanianism)과 동일한 선상에 있습니다. 샌디매니어니즘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로버트 샌디맨 (Robert Sandeman, 1718~1781)과 그의 장인 존 글라스 (John Glas, 1695~1773)에 의해 18세기 동안 영국 일대와 북미 일부에서 가르쳐진 믿음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한 측면을 일컫는 것입니다. 

샌디매니안(샌디매니어니즘의 추종자)들에게는 구원받는 믿음의 본질이 \'어떤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지적인 동의\'로 축소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샌디맨이 \'의롭게 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적 증언에 대한 단순한 동의이며, 다른 보통의 증언을 믿는 것처럼 그 특성에 있어서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 바와 같습니다(샌디맨은 구원을 얻기 위한 어떤 감정적인 추구가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빠질 수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였지만, 결국 그는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러한 샌디맨의 가르침의 오류를 파악하고, 그 가르침의 위험성을 직시한 잉글랜드의 침례교 목사였던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 1754~1815)는 "믿음이 단순히 감정으로 결코 특징지어질 수 없지만, 또한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감동과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참믿음은 지적인 이해에만 속하는 것이 아님"을 역설했습니다. 철저한 강단 무릎 기도로 설교를 준비했던 스코틀랜드 던디 (Dundee)의 유명한 설교자인 또 다른 로버트, 즉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 (Robert, Murray, M’Cheyne, 1813~1843)은 미처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기도 전에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던 던디(Dundee)교회의 일화로 유명한데, 그는 샌디맨의 가르침에 의해 황폐해진 스코틀랜드를 다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일깨우고 진리의 복음을 설교함으로, 새로운 영적 부흥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하여 샌디매니어니즘은 완전히 괴멸된 것일까요? 비록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1967년 자신의 글(참고 자료 2번)에서 샌디매니어니즘이 앤드류 풀러 (Andrew Fuller)에 의해서 붕괴되었다고 결론지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신-샌디매니어니즘 (neo-Sandemanianism)은 \'사영리\' 혹은 이와 동등한 유의 것으로서 18세기의 샌디매니어니즘과 동일한 선상에 있는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변형하여 사용하는 현대의 복음 전도로 정의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신-샌디매니안 (neo-Sandemanian)은 복음 전도에 있어서 영접 기도문을 통한 영접시키기 방법을 사용하거나 가르치거나 추종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많은 수의 신-샌디매니안들이 그들의 오류를 알지 못한 채 신-샌디매니안이 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깊이 있게 그리고 자세하게 고려하지 않고 그 방법을 받아들인 결과라고 이해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신-샌디매니어니즘의 깊은 불합리성을 일단 깨닫게 되면, 진정한 복음 전도와 설교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기대감이 있습니다. 

신-샌디매니어니즘의 중요 실수는 중생케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구원받는 믿음을 주어서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하여, 죄를 깨닫고 회개케 하시는 일에 대한 실제적인 부인입니다. 영접 기도에 대한 의존은 때때로,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께서 부여하시는 선물인 믿음을 배제하고,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 두 번, 세 번 지속해서 영접 기도를 하도록 이끄는 웃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도 아니며, 한 번의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도 아니며,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선물입니다. 샌디매니어니즘에 대한 국내 자료는 별로 없으므로, 글 말미의 영문 자료들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또 다른 로버트, 즉 런던신학교 학장으로 재직 중인 로버트 스트리벤스 목사님 (Rev Robert Strivens)이 쓰신 글에서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 자료 2번) 

샌디매니어니즘에 대해서 더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이것은 진실로 현대적 복음 전도 및 설교와 같은 선상에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오직 다른 것이 있다면, 신-샌디매니어니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한 \'영접 기도\'가 원래의 샌디매니어니즘에 첨가된 것뿐입니다. 신-샌디매니어니즘은 샌디매니어니즘의 약점을 알고 있으므로, 지적인 동의로는 충분하지 않지만, 진지하게 영접 기도를 따라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샌디매니어니즘은 지적인 동의만으로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반면, 신-샌디매니어니즘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 (문맥상 예수님께서 미지근한 신자를 향하여 열심을 내라는 촉구임)을 완전히 잘못 인용하면서, 동의와 선택과 의지의 행위를 통해서 영접 기도라는 것을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샌디매니어니즘은 성경 구절을 사용해서 자신의 전도 방법을 진리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지각이 있는 신자라면, 이 둘은 본질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단순한 동의에 의해서건, 선택 과정을 통과한 자판기와 같은 한 번의 기도에 의해서건 \'인간적인 결정\'이 바로 믿음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