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글과 자료

믿음의 글/자료 게시판은 이 시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현대 기독교와 교회의 모습, 창조주 하나님과 그 분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게시판입니다. 특히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으로 우리의 주가 되시는지 그 표적인 부활의 역사적 증거 자료와 함께 흔들릴 수 없는 부활신앙에 서도록 격려하고 북돋우는 도움의 글들을 올리고 있습니다. 교우들의 많은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Title부활이 복음이다! - 권연경 교수2016-01-17 00:08:50
Writer
 
2011년 4월호 '목회와 신학'에 실린 숭실대 권연경 교수님의 글 '부활이 복음이다!'를 소개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에 대해 잘 설명한 글이라 생각되어 강추합니다.  
물론 이 글에 대해 비평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와 부활의 역할에 대해 눈을 뜨게 하는 insight가 있다고 보입니다.
큰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논문과 함꼐 권연경 교수의 인터뷰 clip도 아래에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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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복음이다! _ 권연경

- 목회와 신학 2011년 4월호 권연경 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부활이 복음이다!

 

I. 부활의 중심성

소외된 부활

필자는 자주 우리의 “신학적 편식”에 관해 불평을 하곤 하는데, 그 편식의 가장 치명적인 희생물 중 하나가 부활이 아닌가 싶다. 어느 코메디언의 말을 빌자면, 지금 우리는 “(대속의) 십자가만 기억하는 편리한 교회”라 불릴 법하다. 하지만 편식의 대가는 때로 치명적이다. 특히 우리가 기피하는 것이 부활처럼 필수적인 영양소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나사렛 예수가 둘이 아니듯, 구원의 드라마에서 십자가와 부활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한 행위 속의 두 몸짓처럼,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 하나도 빛을 잃는다. 어떤 이유로든 하나를 무시하며 다른 하나에만 집착한다면, 우리가 잡았다고 생각하는 그 하나조차도 실상은 허상일 가능성이 많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모습이 그와 같은 상황이 아닐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는 열광하지만 부활에는 당황한다. 내가 열광하는 복음의 드라마에서 십자가는 확실한 주연이지만, 부활이 맡은 배역의 의미는 선명치 않다. 교회에서도 십자가와 대속의 은총을 노래하는 찬송은 사시사철 불리지만, 부활을 환호하는 찬송은 부활절만 지나면 금방 “철지난” 캐롤처럼 어색하다. 예수는 고작 3일 죽음 속에 있었고, 이제는 부활하신 주로 계시는데, 우리에게는 늘 십자가가 더 생생하고 부활은 여전히 서먹서먹한 손님같다. 하지만 갈보리 언덕에서는 고향의 편안함을 느끼면서 빈 무덤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 우리의 영성은 과연 건강한가?

 

부활의 중심성

역사적 견지에서 말하자면, 교회의 실질적 출발점은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이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보여주듯,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에 대한 모든 기대를 끝장내는 절망이었다(눅 24:21). 물론 예수를 반대하던 이들은 그것이 마땅한 귀결이라 여겼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반전시킨 것은 어떤 생각의 변화가 아니라 부활이라는 실제 사건이었다. 절망한 제자들을 예수의 증인으로 변화시킨 것은 문득 얻게 된 어떤 신학적 깨달음이 아니라 부활의 충격, 곧 다시 살아나 그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와의 맞닥뜨림이었다. 이 만남 속에서 그들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고, 이 부활의 빛 아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당연 초대교회 최대의 화두는 부활이었다. 사도들은 무엇보다도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자들이었고(행 1:22), 이 부활 메시지로 인해 당시의 권력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행 4).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일종의 신학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행하신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였다(눅 1:1). 그리고 그 사건의 절정은 바로 예수의 부활이었다. “그가 과연 부활하셨다!”는 외침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자신의 사역이나 신자들의 믿음이나 그 모든 것이 허망한 것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한다(고전 15:14).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이든,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신자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15:17).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의 속죄조차도 무의미한 낭설일 수밖에 없다. 복음은 분명 “십자가의 도”로 요약할 수 있지만, 실상 그 십자가의 메시지를 복음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부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입에서도 쉴 새 없이 부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II. 십자가는 부활 생명의 원천이다

바울은 자기 복음을 “십자가의 도”라 요약했다(고전 1:18, 24). 그가 전한 유일한 메시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였다(2:2). 그렇다면 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두고 무슨 말을 했던 것일까? 물론 그는 예수의 죽음이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말했다(롬 3:25; 고전 15:3; 갈 1:4; 3:13). 당연히 우리도 여기에 희망을 건다. 우리의 죄가 해결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이 십자가의 대속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이 여기서 멈추면, 우리는 바울의 십자가 신학을 크게 오해한 것이다. 바울이 십자가를 통해 강조하려고 하는 더 중요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가 부활 생명을 가져오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는 선포다. 단순한 대속의 근거로서 뿐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원천으로 제시된 것이 예수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십자가와 믿음의 의미를 망각하고 “율법의 행위들”에로 기울어지는 성도들의 “어리석음”을 질책한다(3:1). 그런데 바울이 지적하는 그들의 어리석음은 그들이 십자가의 대속을 잊었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성령을 무시한다는 사실이었다. “여러분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서였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듣고 믿어서였습니까?”(3:1-5).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 칭의의 해답인 이유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성령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다시 언급되는 3:13-14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고 이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건지신 사건이었다(13절). 이 점에서 그의 죽음은 분명 대속적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대속적 죽음은 그 자체로 구원의 완결이 아니라 또 다른 목적을 가진 사건이었다. 이 대속적 죽음의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들에게도 미치는 것이고(14절 상), 또 하나는 우리가 믿음을 통해 약속하신 성령을 받는 것이다(14절 하). 간단히 말하면, 십자가 자체가 성령의 은사를 의도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신” 일은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신”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4:4-6).

이처럼 갈라디아서에서 십자가는 죽음 자체의 신학적 의미를 넘어 성령의 선물이라는 실제적 체험의 견지에서 이해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령의 유일한 원천이다. 그러기에 성령은 “그 아들의 영”으로도 불리운다. 물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은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이다(3:21). 율법이 구원의 길일 수 없는 것은 율법에는 이런 생명의 능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성령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5:5). 성령을 받으면 무조건 영생에 이른다는 편리한 생각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그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영생을 수확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6:7-8). 바울이 믿음 혹은 그 믿음의 목적인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 생명의 성령이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의 성도들에게 강조했던 십자가의 의미였다.

 

고린도전서

십자가가 강조되는 또 하나의 서신이 고린도전서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동일한 관심사를 확인하게 된다. 바울의 주 관심사는 복음 선포지 세례가 아니다. 자기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가 헛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1:17). 바울은 자기 복음을 “십자가의 말씀”으로 요약한다. 이로써 그는 지혜 혹은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던 고린도 신자들의 이율배반적 영성을 비판한다(3:1-3). 인간이 내어놓을 수 있는 일체의 가치를 폐기처분하고(3:1-3; 4:18-23), 오직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도록” 함으로써,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인간적인 것들을 두고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셨던 것이다(1:29-31).

하지만 십자가가 세속적 지혜나 강함에 대한 효과적 대안이 되는 것은 십자가가 함축한 어떤 신학적, 혹은 철학적 논리 때문이 아니다. 세속적 관점에서는 분명 십자가가 어리석어 보이겠지만, 실제로 십자가는 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어리석은 것으로 드러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능력이요 지혜다(1:18, 24). 물론 십자가 상에서의 수치스런 죽음에는 유대인이 추구했던 “표적”도, 헬라인들이 추구했던 “지혜”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가 구원의 효력을 갖는 것은 이런 표면적 미약함과 어리석음 배후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1:18).

[우리가 전하는 십자가의 말씀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1:23-24).

십자가가 야기하는 가치의 역전은 단순한 발상의 전환을 넘어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새로운 “지혜”와 “능력”의 체험을 포함한다. 이것이 바울의 최종 논점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1:25). 바로 여기에 십자가 복음의 우위가 존재한다.

이처럼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집착” 배후에는 능력에 대한 관심이 자리한다. 그는 “거창한 말과 지혜” 혹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에 의존하지 않았다(1:17; 2:1, 4). 이런 방침 배후에는 선포자의 존재감이 십자가의 복음을 가리는 상황을 피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오히려 그의 선포는 복음 자체,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로 집중되었다(2:2). 바로 십자가가 능력의 유일한 원천이었기 때문이다(1:17).

제가 이렇게 했던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조성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십자가가 “헛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목적이 좌절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1:17). 바울은 이 목적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푼다. 바울은 성도들의 믿음이 선포자의 수사적 조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발아하고 유지되기를 바랐다. 이것이 십자가에 집중한 바울의 실질적 의도다. 그러니까 그가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메시지를 꾸밈없이 선포한 것은 어리석음 자체의 역설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는 실질적 구원의 능력을 매개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신자들이 상속해야 할 하나님 나라란 말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능력으로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이다(4:19-20).

지금까지 살핀 것처럼, 많은 경우 바울은 성령과 능력을 말하기 위해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새로운 생명을 말하기 위해 죽음을 이야기한다. 십자가는 우리 죄를 위한 대속적 죽음이지만, 이 대속의 죽음 자체가 새로운 생명이라는 큰 드라마의 한 부분이다. 바울이 늘 예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자기 몸에 나타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고후 4:11). 역설적이지만, 결국 바울의 십자가 복음은 부활의 복음이다. 하지만 너무 자주 우리의 십자가 이야기는 대속이라는 삽화에서 정지한다. 성령이나 능력, 혹은 부활 생명의 언어가 십자가와 연결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의 십자가 복음은 바울이 선포한 십자가 복음은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로 가셨던 것처럼, 신자들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부활에 참여하리라”는 목적의식 아래서 살아간다.

 

. 부활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

예수의 십자가가 새로운 생명을 산출하는 근거라면, 십자가 복음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어떠할까? 복음을 믿는다는 것, 혹은 그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 그 십자가 죽음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 이것이 믿음의 핵심일 것인가? 물론 그것이 우리 믿음의 주요 항목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이런 식의 믿음 개념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분량에 못 미치는 감이 있다. 실상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 속에는 “대속적” 은혜를 넘어서는 또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 이 믿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한 바울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브라함을 의롭게 했던 믿음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런데 (할례가 아니라) 믿음이 의로움의 수단인 이유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믿음의 전형인 아브라함에게 눈을 돌린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수많은 자손을 약속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것이[=그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3, 9절). 바울은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 진술이 실제로는 대단히 놀라운 장면을 묘사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희망을 갖고 믿었던” 믿음이었다(18절).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약속, 그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약속이 주어지던 시점은 인간적으로는 그 약속의 실현이 불가능한 시점이었다. 약속을 들을 당시, 아브라함이 직면해야 했던 실제 현실은 “백세나 되어 죽어버린 자신의 몸과 죽어버린 사라의 태” 뿐이었다(19절. 개역의 (죽은 것) “같음”이라는 표현은 원문에 없는 첨가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의 믿음은 약해지지 않았고(19절), 그는 자식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았다(20절). 오히려 그는 믿음으로 더 강해졌다. 곧 “그에게는 약속하신 것을 실행하실 능력 또한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 것이다(21절).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는 죽은 자기 몸과 죽은 사라의 태로부터 생명이 태어나게 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바로 이 믿음을 그의 의로 여겨 주셨다(22절; 3, 9절). 이런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핵심이라는 의미다. 바울의 말처럼,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이”시다(4:17).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이런 생명의 창조주이심을, 죽음 속에서도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분임을 믿는 것이다. 바로 이런 믿음, 곧 생명과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브라함을 의롭게 했던 믿음이었던 것이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부활의 믿음

바울이 아브라함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바로 우리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하나님을 믿어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장차 동일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할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믿음이 동일하다고 한 것은 우리 또한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이다(4:24). 자기와 사라의 몸을 다시 살려 아들을 태어나게 하실 분을 믿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믿는 우리들의 믿음은 동일하다. 모두가 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인 것이다. 한 마디로 부활신앙이다. 이 신앙을 발휘하는 정황은 서로 다르지만, 부활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표현이라는 점에는 다를 바 없다. 바울은 우리가 바로 이 믿음, 곧 생명과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부활의 하나님을 믿어 의롭게 된다면, 부활이 없는 칭의란 존재할 수 없다. 칭의를 죄 용서와 동일시하고, 이를 전적으로 십자가의 효과로 간주하는 통상적인 경향과는 달리, 바울은 칭의가 십자가 뿐 아니라 부활 또한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에서 일으키신 “예수 우리 주”는

우리 범죄함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고, 우리의 칭의 때문에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셨습니다(25절).

물론 이는 십자가 죽음이 죄 용서를 위해, 그리고 부활이 칭의를 위해 필요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죄용서와 칭의가 나누어질 수 없는 것처럼, 십자가와 부활도 그러하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칭의에는 십자가 뿐 아니라 부활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에는 십자가에서 드러난 그의 사랑 뿐 아니라 부활에서 증명된 그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포함된다. 그리고 바로 이 능력이 우리 믿음을 다른 모든 인간적인 수단들과 구별해주는 차별성이다.

이러한 해석은 결코 자의적 읽기의 결과가 아니다. 자주 오해되곤 하는 로마서 10:9-10절이 이를 잘 보여준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익히 들어 아는 것처럼,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10절). 문맥을 무시하면 이 구절은 자칫 (행위가 없어도) 마음 속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값싼 은총의 표어처럼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이 구절의 의도를 정반대로 뒤집은 것이다. 성경적 숙어에서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이요, 당시의 상황에서 입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내용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바로 앞의 9절을 읽어야 한다. 10절은 9절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입으로 주 예수를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것을 당신의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주 예수라는 고백, 곧 예수가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고백이 필요하다. 물론 이 고백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전제한다(행 2:36).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어야 한다(고전 15:2). 여기서 우리는 구원 얻는 믿음의 내용에 십자가와 대속 대신 부활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물론 그렇다고 십자가가 중요치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만큼 부활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에는 여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는 것이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히브리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 믿음으로 사라는 불임인 데도 불구하고, 그것도 나아가 많이 들었을 때, 임신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그것은 “약속하신 분은 신실한 분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11:11). 이 믿음의 결과로 “한 사람, 그것도 죽은 사람으로부터 ... 많은 후손이 태어났다”(11:12. 여기서도 “(죽은 자와) ”같은“이라는 말은 원문에 없는 첨가다). 아들을 약속한 분은 믿을 만한 분이다. 곧 그는 약속대로 죽은 태에서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 사라는 이를 믿었고, 이로써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다. 이삭의 죽음은 약속의 끝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다(11:17).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는 것은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될 것을 믿었다는 뜻이다. 이삭은 죽는다. 그런데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생겨날 것이라는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믿었다면 그의 속내는 분명하다. 곧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19절 상). 실제로 이삭이 죽고 되살아난 것은 아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 속에서 그는 사실상 죽고 부활한 것이나 다름없다. 돌려 말하자면, 그는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돌려받았다”(19절 하). 바울이 이삭 탄생의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에게서 부활신앙을 보았다면, 히브리서는 이삭을 바치는 행동에서 동일한 부활신앙을 보았던 셈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생명의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믿는 것이다. 이 점에서 사람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이 다르다. 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복음이다(롬 1:16; 고전 1:18, 24). 인간적인 수단을 의지하는 것은 헛되다. 무슨 수로도 생명은 만들 수 없고, 죽은 자는 살릴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럴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부활이 가장 결정적인 하나님의 계시인 이유가 여기 있다. 부활하신 예수와의 마주침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죽은 몸에서 이삭이 나게 하신 하나님, 골짜기의 “아주 마른” 뼈들을 엄청난 군대로 살아나게 하신 에스겔의 하나님을 경험했다(겔 37장). 복음은 바로 이 부활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은 그 생명의 하나님이 다시금 우리를 찾아와 우리와 우리의 세계를 새롭게 하시겠다는 오랜 약속의 성취였던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라 부르는 것이 공연한 언어습관이 아니었다(롬 8: 11; 고후 4:14; 갈 1:1).

 

. 우리를 살리는 부활의 영

성령과 몸의 부활

아담의 창조에서 보듯, 생명은 하나님의 숨결에서 시작한다. 바로 하나님의 영, 곧 성령 이야기다. 그래서 성령은 생명의 성령이라고 불린다(롬 8:4). 십자가가 부활을 바라보고, 구원얻는 믿음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라면, 이 복음이 성령에 관한 이야기로 표현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결국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듯, 우리를 살리시는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살려주는 영”이라 부른다(고전 15:45). 하나님의 숨결로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지만(이를 “생령(산 영)”으로 옮긴 개역은 오역이다), 부활하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 그러기에 성령은 하나님, 곧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기도 하고(롬 8:9, 11), 또 “그 아들의 영”이기도 하다(롬 8:9; 갈 4:6). 이 성령 안에서 우리는 몸의 부활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바울이 의의 소망이나, 영생이나, 몸의 부활과 같은 구원론적 개념을 항상 성령과 연결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갈 5:5; 6:7-8; 롬 8:9-10). 부활의 영을 통해서만 우리가 미래의 소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망을 향한 여정에서 예수의 부활이라는 종말론적 현실은 우리의 부활을 보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 신자들과 오늘의 우리 사이에 또 한 가지 다름을 발견한다. 바로 부활의 소망에 대한 현격한 태도의 차이다. 바울을 비롯한 신약의 저자들은 구원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았고, 그 구원에 이르기 위해 현재 고난의 세월을 인내한다고 생각했다(롬 8:17-18). 그리고 그 소망의 핵심은 “몸의 속량” 곧 우리 몸의 부활이었다(8:23). 현재의 썩을 몸으로는 썩지 않을 나라를 상속할 수 없다(고전 15:50). 그러기에 우리는 이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할 것을 고대한다. 지금 우리가 썩을 아담의 몸을 입었던 것처럼, 장차 썩지 않을 몸,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입게 될 것이다(15:49, 51-54; 고후 5:1-5). 물론 이 부활은 아직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참으며 기다린다”(8:24-25). 물론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다. 바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을 아는 믿음이다(4:14).

 

부활과 새로운 삶

몸의 부활은 미래이지만, 그 부활의 영은 지금 우리들 속에 내재하고 역사한다(엡 1:19-23). 바울은 우리가 바로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말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 곧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삶을 다스린다는 말과 같다(롬 8:11). 이 성령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이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우리는 몸의 부활을 향한 여정을 이어간다. 부활의 소망은 그 부활을 얻기에 합당한 삶을 요구한다. 그래서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은 지금 우리의 삶을 다스려 우리로 몸의 부활에 이르게 한다. 성경이 끊임없이 경고하는 것처럼, 이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고 인간적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다. 반면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이 몸의 부활, 곧 영생을 향한 유일한 통로다(롬 8:13; 갈 6:8). 베드로전서에서처럼,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고, 이로써 우리는 “살아있는 소망” 곧 구원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게 되었다(벧전 1:3-5).

바울의 복음에서 새로운 삶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십자가와 죽음의 이야기와 얽힌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고후 5:14). 그가 이처럼 모든 이를 대신해 죽으신 것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 자신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도록 하려는” 것이었다(5:15). 그러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새로운 피조물” 곧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라 불린다(5:17).

혹은 십자가가 바울 자신의 죽음과 결합되기도 한다. 그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갈 2:20). 이 죽음의 결과는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었다(2:19). 곧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다(2:20).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의사가 없다. 이를 통해 바울과 세상은 서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6:14). 물론 여기서도 그 결과는 “새로운 창조”(6:15), 곧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새로운 삶이다(5:16-26).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곧 그의 죽음을 통해 대속적인 죄의 용서를 경험한다(롬 3:24-25). 그리고 그의 죽음은 또한 믿음으로 그 안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의 죽음을 의미한다(6:3-4절 상). 하지만 이 죽음은 드라마의 한 삽화다. 그의 죽음 자체가 새로운 삶의 논리 속에 엮여 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죽으심 안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영광을 통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처럼 우리 역시 생명의 새로움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6:4).

 

십자가 모양의 삶

이처럼 하나님이 부활의 성령을 통해 우리의 죽을 몸을 살리시는 것은 그 성령을 통해 우리를 부활에 합당한 길로 인도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은 순탄치 않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통해 부활과 승천의 영광에 이르렀던 것처럼, 그의 제자들 역시 부활을 향한 여정은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한다.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하지만, 이 새로운 삶의 모양새는 놀랍게도 십자가다. 복음이 능력이라는 것은 세속적 의미의 힘이라는 말이 아니라 부활에 합당한 삶, 곧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라는 말이다. 예수에게 있어 이런 삶은 십자가를 향한 삶으로 나타났다. 그의 뒤를 따르는 자들이 다를 수 없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리라는 기독교적 소망은 그의 죽음/고난에 참여하겠다는 삶의 의지로 표현된다(롬 8:17-18; 고후 5:1-5). 예수의 생명이 이 죽을 육체에 나타나기를 고대하기에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예수를 위해 항상 죽음에 넘겨지는 삶을 감수하는 것이다(고후 4:10-11).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고백은 그의 이런 관점을 잘 요약해 준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3:10-11).

모든 세속적 의미에서 기득권층이 되어버린 한국교회가 이 진술의 속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고난”의 삶을 잃었다는 것은 고난 이전에 우선 “삶”을 잃었다는 말이 된다. 십자가의 생명 외에는 다른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우리 교회의 이런 세속성 역시 부활에 대한, 거기서 주어지는 새로운 삶에 대한 각성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다.

 

맺는 말

현재 한국 교회의 위기는 부활 복음의 위기다. 십자가로 대표되는 대속신학에 자폐적으로 몰두하며 부활 생명을 놓치는 위기이기도 하고, 십자가의 형태로 드러나는 이 부활생명을 드러내지 못하는 도덕적 무기력의 위기이기도 하다. 부활의 기적이 빠진 대속신학은 속죄양 이론이라는, 그 자체로는 특별히 기독교적이라 할 것도 없는 문화이론으로 전락할 공산이 크다. 창조와 부활의 기적을 믿지 않고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멋지고도 편리한 이론이다. 필자는 십자가에 대한 우리들의 열정이 이런 수준에 멈추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려한다.

정작 복음을 복음으로 만드는 것은 부활 이야기다.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이다. 생명의 창조주인 나를 믿겠느냐고 아브라함에게 도전하신 분, 선지자를 향해 말라빠진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고 도전하시는 분, 예수의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그 복음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도전하시는 분이다. 당연히 세상이 제일 믿기 어려워하는 것도 이 부활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조차 이 선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겨워하지 않는가? 교회가 본연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길은 이 부활의 하나님을 새로이 만나고 그 충격을 회복하는 것이다. 최초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메섹 도상의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