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지금, 그리고 부흥을 위한 개혁 - 5 종교 개혁과 현대 전도
북한사랑 PN4N 2010년 12월호
글: PN4N 편집부
"우리는 설교자로부터 들었습니다. 설교자로부터 전해진 진리는 이제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보좌로부터 나오시는 더 위대한 교사를 원합니다. 진리를 각 개인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의 고유한 일입니다." (찰스 스펄전, 1855년 1월 22일 주일 설교 중)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우리의 노력을 어떤 방법으로 기울이고 있습니까? 현대 전도 노선을 따라, 소위 '회심자'들의 무리들을 다루기 위해 결심을 이끌기 위한 감언이설과 현대화된 장치들이 동원된 거대한 규모의 단기간의 캠페인입니까? 아니면 청교도식 복음 전도와 같은 옛길로 돌아가 지역 교회에 기반하여 차분하고 더 넓고 긴 전략을 사용하여, 사람들이 단순히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도록 구하고,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속도에 따라, 그 전달된 메시지를 통하여 통치하시는 성령님께서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끌어 오시도록 하고 있습니까? 어느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더 충성하는 것입니까? 어느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들이 지금 가장 시급한 검토를 요구하는 것들입니다." (제임스 패커, 18장 중) 종교개혁주일을 지나며
12월 초에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미, 대림절 안으로 들어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시점은 이제 막 종교개혁주일을 지난 시점입니다. 그래서 간단히 관련하여 몇 자 적어 볼까 합니다. 우리가 글을 통해서 함께 공부하고, 부흥을 맞이하기 위해 오류를 고치기 위한 '옛길 찾기'는 당연히 종교 개혁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 개혁이 무엇과 관련이 있는지 아는 사람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16세기 당시의 부패상에 눈을 뜨고, 성경을 깨닫고, 옛 신앙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부흥을 선사하셨습니다. 당시의 종교 개혁을 '16세기 종교 개혁'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지금 진행 중인 '옛길 찾기'는 따라서, 다른 말로는 '21세기 종교 개혁'이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린 것이고 무엇을 개혁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바로 이것에 대하여 답해 볼까 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와 함께 애통하고 있는 지금의 종교 개혁자들을 위해 '격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래와 같이 격려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개혁자들이여 슬퍼하지 마시오. 옛 복음을 들으며, 통곡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소이다. 이 놀라운 일들이 드디어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소이다. 우리가 지금껏 다른 신을 예배하고 있었다는 놀라움과 깊은 충격 안에서 어찌할 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소이다. 아직 때는 깊고 심히 어두워 앞을 볼 수 없소이다. 그러나 이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위해 주어진 시간일 뿐임을 기억하시오. 이 어둠의 때를 거두시고, 친히 역사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시간임을 잊지 마시오. 그러므로 오늘도 당신의 쟁기질을 멈추지 마시오. 그리고 옛 복음이 진정한 복음이며, 성경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외치기를 주저하지 마시오. 당신의 목이 쉬고, 기운이 진하여 고갈되기까지 하나님께 당신을 드리시오.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시며, 마침내 성취하실 것이오. 그리고 당신의 수고가 무색하리 만큼 놀랍고 풍성한 상급을 안겨 주실 것이오."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i Deo Gloria)
우리나라에서는 지금은 교회에서 구원의 교리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경우가 희소하지만, 알미니안주의에 무게를 둔 교단이 소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수십 년이 넘도록 교회를 옮기지 않은, 회심한, 그러나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신자의 회중 기도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여 주시고, 타락하여 건짐 받을 수 없는 죄인을, 성령님께서 부르시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기도야말로 개혁 신학의 정수를 보여 주는 기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는 사람을 별로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고, 우리에게 주신 자유 의지를 사용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정 회심한 신자는 그 신앙이 하나님께로서 왔기 때문에, 자신의 처참하게 타락한 상황을 인식하고,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여, 무한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 영광을 가로채지 않으려는 고백이 물 흐르듯 흘러나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함인 것입니다.
장로교인과 침례교인과 감리교인과 성결교인들이 함께 예배하며 교제하는 것은 한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나, 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 하는, 한 방향에서 도무지 차이점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거듭난 신자는, 교리를 따로 배우지 않아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지향점을 향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사용하는 전도 책자를 들춰 보면, 바로 그 자리에서 제대로 한번 기도를 따라 하면 영접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거의 빠지지 않고 있으며, 이것에 결과적이면서도 깊은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서 기인하는 구원을, 한 번의 기도로 대체해 버린 것은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비대칭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남아 있는 타락한 이성의 상태가 하나님의 영광과 충돌하는 가운데, 인간적인 요소들을 부드럽게 첨가하여, 그럴싸한 것으로 만들어 놓고는 그것을 진리인양 붙들고 있음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간혹, 신앙의 선배들이 "구원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 이외에 첨가할 것이 없다"고 쓴 것을 읽을 때 분별하십시오. 요즘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지적인 믿음과 일회적 입술의 고백으로 끌어들이려 합니다만, 이것은 우리의 행위가 첨가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의미에서 쓴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기에서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중생의 결과로서의 믿음과 받아들임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한 가지 더 살펴봅시다. 우리는 이 전도지, 이 방법, 이 전도자, 이 집회를 통해서 구원받았다라고 흔히들 얘기하곤 합니다. 여기의 전도지, 방법, 전도자, 집회들은 모두 불완전하고 심지어 오류가 뒤섞여 있기도 하며, 때로는 이단에 속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함입니까? 우리는 전도지와 방법과, 사람과 집회와 같은 도구들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어 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전도지와 방법과 사람과 집회는 불완전하지만,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일하셔서, 택하신 자들을 불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아니 자주 속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통로를 통하여 구원 받았으니, 그 통로는 선하고 흠이 없거나, 흠이 있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을 경험한 이후에도 도구들에 대한 개혁을 주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신 분임을, 따라서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실 뿐임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복음은 근본적으로 변질될 수도 없고, 인간이 변질시킬 수도 없습니다. 다만, 인간이 잘못된 이성으로 복음을 담는 그릇 (신학)을 마음대로 빚어내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개신교 신자들은 자신이 잘못된 도구를 통해서 구원 받은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권능 가운데 일하셨음을 깨닫고, 잘못된 도구를 폐기하거나 개혁함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길을 밟은 무수한 신앙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간증하시는 분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영역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간증할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도구들에 대한 검증이 없이, 마치 하나님이 사용하셨으니, 모두가 자신이 경험한 도구들을 통과하는 것이 좋은 것으로 은연중 회중들에게 소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구들은 반드시 성경의 빛 아래서 검토받아야 하고, 사람과 방법에 영광 돌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개혁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개혁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본 현대 전도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성령님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가 임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스스로 믿을 수도 없고, 구원 받을 수도 없다는 견고한 가르침을 가르치고 배우는 지체들이여, 세미-펠라기우스적 접근을 혐오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 한다고 열을 올리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이여, 지금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전도 책자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는지 읽어 보십시오. 그 작은 인쇄물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음을 곧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의지의 행위인 믿음으로 영접합니다."
여러분의 전도 훈련 가운데 무엇이 가르쳐지고 있는지 조사해 보십시오. 영접 기도 하나만으로는, 다소 부족하여, 준비 기도, 결신 기도, 확신 기도로 확장시켜서 좀 더 세련되게 해 놓은 것을 보십시오. 그 전도지와 방법에는 당신이 믿는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중생의 교리는 아예 적혀 있지도 않으며, 가르쳐지지도 않으며, 인정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는데, 그 다음 그것의 적용은 어디에 돌리고 있는지 보십시오. 성령 하나님입니까? 일회적 기도 통과 예식입니까? 성령님은 그 전도 방법을 도우시는 도우미 정도로 전락시키고자 하는, 이 기괴한 현대 전도를 개혁주의 지체들은 어찌하여 열렬히 지지하고 있는 것입니까? 구원의 주체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성령님을 뺀 자리에, 전도자와 일회적 기도를 채워 넣고, 성령 하나님을 도우미로 전락시키는 이 신성 모독에 대하여 아직 눈을 뜨지 못했단 말입니까?
너무 지나친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신다면, 이 기도를 잘 통과한 사람들에게 전도자가 무엇이라고 선포하는지 보십시오. "이제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면죄부를 사기 위해 떨어뜨린 동전이 소리가 날 때, 당신의 죄가 사해진다는 이전의 교만한 가르침이, 오늘날에도 방법을 바꾸어 적용되고 있는 이 현실을 아직 보실 수 없단 말입니까? 죄 사함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선포하는 권리를 언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양도하셨습니까?
여기에는 영접 기도 이전까지의 전도 방법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전도법에는 복음적 내용을 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전도 중에 택하신 자를 꺾으셔서, 회개케 하시고, 중생의 은혜를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그 방법이 잘되어서, 전도자가 잘해서, 일회적 기도까지 잘 마무리되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성령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마십시오. 돌이키십시오. 이제 피전도자의 죄를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설명한 다음에는, 영접 기도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는 중생을 전하시고, 이것을 체험하여,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게 되도록 구하라고 전하십시오. 이것이 개혁주의 복음 전도, 즉 옛 전도 방법임을 알고 가르치십시오. 그리고 신학을 신앙과 일치시키십시오. '오직 결단'을 '오직 은혜'로, '오직 영접 기도'를 '오직 믿음'으로 전환시키십시오. 성경 구절들을 이리저리 묶고 연결하여, 결단을 정당화시켜서, 성령을 몰아내고자 하는 일을 그만 두십시오. 이제 개혁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복음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본 현대 전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움과 마지막 심판이라는 보편적 기독교회의 관점에서 살펴봅시다. 여기에서도 삼위일체는 부정되어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구원의 주체가 아니라 전도 사역의 도우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밝혔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영접 기도를 따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전도자들이여,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영접 기도를 따라 하도록 하실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도 영접 기도를 따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골라내어, 당신의 기도는 가짜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작성된 문구와 시스템에 따라 사람을 감정적으로 움직이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셔도 기도를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전도를 해 본 사람이면, 이성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당신의 기도는 진실하므로,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축하드립니다"라고 얘기하거나, "당신은 기도를 따라 했지만 가짜이므로, 여기서 멈추고 성령님께서 당신의 입을 친히 여셔서 진짜 기도를 하도록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라고 할 전도자는 누구입니까? 성령님께서 앉으셔야 할 자리에서 이제 그만 내려오십시오.
그 다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독자들 중 일부, 즉 믿음의 완성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를 사용하는 수용이 있어야만 한다는 이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질문하고자 합니다. 과연, 현대 전도 방법에 있어서, 구원에 이르도록 초청하여 기도하게 만드는 일이, 웨슬리가 이해했던 자발적인 의지의 사용과 동일한 유의 것일까요?
신인 협력설에서조차도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주어져야만 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전도에서는 인위적인 영접 기도를 앞세우고, 기도를 통과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순서가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중생의 근원인 은혜의 교리도 묵살되어 있는 것입니다. 웨슬리가 입이 닳도록 증거했던 중생은 현대 전도에서는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웨슬리가 했던 설교와 가르침과 전도 사역을 조금만 살펴보십시오. 이 안에 오늘날과 같은 영접 기도로 이끌고 기도시켜서 거듭난 자를 만들어내는 시도가 있었는지요? 결론은 무엇입니까? 현대적 영접 기도식 전도 방법은 개혁주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관점에서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제 개혁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동강난 구원의 교리와 제자 훈련의 허점
영접 기도문식 전도는 구원의 교리들의 유기적 연결을 끊어 놓았습니다. 중생은 아예 배제되었고, 성경적 칭의의 교리도 따라서 사실상 훼손되었으며, 영접 기도를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된 것으로 얘기하고, 이제 성장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가르침으로, 중생에서 이어져 있는 성화와의 연결을 단절시켜 놓았습니다. 영접 기도해서 일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제자로서 자라 가야 한다는 이상한 시스템을 성경적인 것처럼 견고하게 구축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옛 신학은 무엇입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신자는 당연히 새로운 본성을 받았기 때문에 죄를 멀리하기 시작하고 죄와의 내적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고, 거룩한 삶과 경건에로의 추구가 점점 일어나 결국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삶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신자는 제자이며, 중생한 자는 성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거룩한 삶의 열매는 중생을 증거해 주는 외적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불신자, 영접 기도하고 고백한 신자, 제자 이렇게 세 부류로 사람을 나누는 경향이 우세합니다. 이것은 아시는 것처럼 로마 가톨릭의 학자들이 죄인, 회심자, 성도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누는 것과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의 삼분설의 오류는 무엇입니까? 결국 회심은 했지만 제자로서 혹은 성숙한 신자로서 자라지 않고 그러나 회심을 일단 했으니까 삶이야 믿기 전과 차이가 없어도 하나님의 자녀, 즉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이상한 부류를 끼워 넣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사람의 부류는 언제나 두 가지입니다. 불신자와 신자(제자), 즉 중생하여 회심한 사람은 곧 제자(즉 성장하기 시작하여 지속해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싸우는 사람)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생한 사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죄와 싸우는 과정 가운데 거룩한 삶의 깊이가 들쑥날쑥 하지만 전체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입술로 영접 기도는 해서 회심만 하고 경건한 삶에 대한 성장이 없는 사람이 있고, 회심한 후에 제자 훈련을 받아서 제자가 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자는 회심한 것이 아니라, 회심한 것처럼 보이는 불신자일 뿐인 것입니다.
거룩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입술의 고백은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중생을 통한 체험이 없으며, 따라서 구원 받는 믿음이 아니며 따라서 불신자의 그룹에 속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날 소위 '제자 훈련'의 허점이 있는 것입니다. 중생하지도 않은 사람을 영접 기도 통과시킨 후에 제자 훈련 과정으로 인도해 버립니다. 여전히 구원의 확신도 없으며 거듭나지도 않았는데, 즉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키우겠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늘로부터 거듭난 사람은 반드시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같이 중생이 증거되지 않는 시대에, 제자 훈련이 팽배해 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제자 훈련이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려면, 중생의 경험이 분명한지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불신자와 신자(제자)의 이분설이 합당하며,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신자 안에서 보여지는 차이는 다만, 성숙의 정도에 대한 차이일 뿐이지, 하늘로부터 진정 거듭났다면 모두가 비록 속도는 다르지만 자라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부류에 속한 사람을 영접 기도를 통과했다고 하여 '자라지 않는 신자' 혹은 '육적 그리스도인'과 같은 이상한 용어로 표현하는 것에 현혹되지 마시고, 자신의 거듭남을 확인해 보십시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중생한 신자를 자라지 못하도록 내팽개치지 않으십니다. 자라지 않는다면 아직 중생하지 않은 것입니다.
J. C. 라일 (J. C. Ryle, 1816~1900) 선생의 가르침을 잠시 인용해 봅시다.
"성경은 항상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산 자와 죄 가운데 죽은 자, 신자와 불신자, 회심한 자와 회심하지 않은 자, 좁은 길로 가는 자와 넓은 길로 가는 자,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로만 나눕니다. 하지만 각각의 범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죄와 은혜의 정도는 각각 다르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를 테면, 한 승강기 안에서 서 있는 사람들의 높이가 서로 다른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 두 범주 사이에는 무한한 간극이 있습니다. 생명과 사망, 빛과 어둠, 천국과 지옥의 차이만큼이나 멉니다. 하지만, 사람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눈다는 말은 성경에서 전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거룩> J. C. 라일, 복있는 사람)
즉 빛을 받은 사람과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만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후 4:6) 비슷한 비유를 들자면, 빛은 입자설과 파동설의 융합으로 현대 물리학은 해석하곤 합니다.
사람에게 구원의 빛이 비추일 때, 그 구원의 교리들은 각각의 독특한 위치를 가지지만(빛의 입자설처럼) 사실은 연결되어 끊어지지 않고 활동하는 것입니다. (빛의 파동설처럼) 따라서 중생은 칭의와 칭의는 양자됨과, 이것은 성화와 그리고 결국 영화로 연결되어, 구원의 시작과 마침까지 죽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접 기도 같은 것으로 동강낼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화되지 않는 중생한 신자와 같은 것은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의 몇 구절을 끄집어내어서, 영접 기도의 타당성을 지지하려는 시도들을 다시 살펴봅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여기의 '영접하는 자'가 과연 영접 기도를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이것은 바로 그 다음에서 바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따라서 영접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모시게 되는 것이고 바로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선물인 것이죠. 그 다음 절에는 뭐라고 나옵니까?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3)
즉 영접하는 자는 영접 기도 통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성령님을 통한 중생한 자를 말하는 것이 이보다 더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습니까? 또 어떤 구절을 사용합니까?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0) 여기서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이 영접 기도를 통과하는 것인가요? 이것은 바로 앞의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와 대구를 이루는 구절입니다. 즉 마음으로 믿을 때 입으로 시인되어지는 것이며,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진정하고 자발적인 믿음의 고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입술만의 고백이 왜 중생의 온전한 증거가 되지 못하는지는 예수님께 가르치신 것을 보면 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입술의 고백이 전부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거듭나서, 그 증거로 마땅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바로 천국 백성이라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사라진 중생을 회복하고, 이것을 칭의와 성화와 연결하기 위해서, 다시 J. C. 라일 선생의 가르침을 들어봅시다.
"우리 영혼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성화입니다. 성경이 진리라면, '성화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구원에 꼭 필요한 세 가지는, 중생과 칭의와 성화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서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거듭나서 의롭다 함을 받고 성화됩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된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상태로 숨을 거둔다면, 천국에 이르지 못할 뿐 아니라 마지막 날에 영화롭게 될 수도 없습니다." (<거룩> J. C. 라일, 복있는 사람) 글을 마치며
이제 개혁의 시간 안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진정 빛의 자녀입니까? 그리스도의 의가 당신에게 주어졌습니까? 거룩한 삶에 대한 추구와 죄에 대한 혐오가 당신을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이끌고 있습니까?
다음 호에서는 한국교회에 새롭게 선보일 '전도지'를 일정 부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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