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글과 자료

믿음의 글/자료 게시판은 이 시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현대 기독교와 교회의 모습, 창조주 하나님과 그 분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게시판입니다. 특히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으로 우리의 주가 되시는지 그 표적인 부활의 역사적 증거 자료와 함께 흔들릴 수 없는 부활신앙에 서도록 격려하고 북돋우는 도움의 글들을 올리고 있습니다. 교우들의 많은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Title한국교회의 지금, 그리고 부흥을 위한 개혁 - 42012-06-10 22:13:50
Writer
한국교회의 지금, 그리고 부흥을 위한 개혁 - 4  
신-샌디매니어니즘 (neo-Sandemanianism)이 현대 교회에 미친 영향 (하)
 
 
북한사랑 PN4N 2010년 11월호  
글: PN4N 편집부


믿음에 있어서 성령님을 교묘하게 배제시킴 

샌디매니어니즘과 신-샌디매니어니즘에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중생시켜서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게 하는 성령님에 대한 불합리한 침묵이 있습니다. 반면에,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은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에 의해서만 주어진다고 이해해 왔습니다. 신-샌디매니안들의 실수는 무엇입니까. 

첫째, 그들은 믿음을 인간의 결단에 의한 의지의 행위로 정의하고, 따라서 "단번의 선택과 기도를 통한 믿음으로 지금 즉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라고 담대하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믿음이 느낌이나 감정에 의존하지 않으며, 성경에 의존한다고 (비록 그들은 성경 문구를 올바르게 인용하고 있지 않음에도)주장함으로 자신들의 논리가 믿을 만한 것으로 주장합니다. 믿음이 감정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타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이것을 사용하여 감정을 죽이거나 약화시켜서 자신들의 논리를 합리화하는 일에 주된 목적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실제적으로 감정은 믿음의 필수 요소가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믿음은 성령님께서 사람들의 마음(heart)을 만지시는 일 가운데 일어남으로 항상 감정적인 움직임을 수반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대답은 몇 가지 질문으로 주어질 수 있습니다. 거듭난 신자로서 당신은 성령님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에 의한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감정적으로 비어 있는 것이라는 데 동의할 수 있습니까? 성령님께서 사람들을 꺾으셔서 죄를 깨닫게 하실 때, 사람들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회개할 수 있습니까? 

비록 반응의 강도와 외적 표현은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감정'은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믿음을 주실 때 포함되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은 성령님을 통하여 사람들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지만 사람이 만들어 낸 지적 동의만의 믿음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만들어 낸 믿음을 추구하는 신-샌디매니안들이 감정을 믿음의 요소에서 배제시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둘째, 그들은 영접 기도를 한 사람에게는 구원받았다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즉시 선포해 버립니다. 어떤 사람이나 설교자나 목사가 한 인간이 구원받았다고 선포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생명책에다 쓸 수 있는 것입니까?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람들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사람이나 사람의 설교나 한 번의 영접 기도에 속한 것도 아니며, 성경 구절의 지적 알레고리를 인위적으로 주입함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 싫든, 좋든 신-샌디매니안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구원에 대한 신적인 권리를 빼앗아 온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셋째, 영접 기도를 성공적으로 통과한 사람들에게는 또한 신속하게 성경 구절을 제시하면서, 영원한 삶이 주어졌다는 확신을 인위적으로 주입합니다. 무엇이 빠졌습니까. 바로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말씀과 함께 있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내적 증거 바로 그것입니다. 옛 설교자들은 이러한 구원의 확신을 얻도록 기도하여 성령의 증거를 지니도록 가르치고 또 가르쳤습니다. 찰스 스펄젼의 설교에서 잠깐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 속에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났음을 우리 영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절대적이 확신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그 확신을 얻었다고 합시다. 그의 머리에는 새 기름이 부어질 것이고, 그의 몸에는 찬양의 흰옷이 입혀질 것이며, 그 입에서는 천사의 노래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은혜의 언약과 속죄의 피와 천국의 영광을 누릴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온전히 확신하는 사람은 얼마나 복되고도 복된 지요. 이런 확신에 이를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내놓을 분들이 여러분 중에도 있을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간절히 알고자 하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분명히 읽고자 하면 머잖아 읽을 수 있습니다. 생생하고 간절한 소원을 품고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는데도 조만간 그를 만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소원하면 하나님이 채워 주십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이 갈망하고 있고 부르짖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니 그를 찬양하십시오. 작은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더 큰 은혜를 구하십시오."  - 마틴 로이드 존스의 <부흥, 복 있는 사람> 중에서 

어떻습니까. 스펄젼의 설교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령의 증거를 얻도록 독려하는 것 이외에, 무슨 인위적인 구원의 확신의 주입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습니까? 결국, 신-샌디매니안들은 믿음의 요소인 감정을 빼버리고, 성경 구절의 지적 주입으로 구원을 확신시키려는 전도와 설교가, 실제적으로는 성령님을 부인하는 신성 모독과, 인위적 성장 지향적 현대 교회의 탈신학성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아직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샌디매니어니즘이 유행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의 교회와 황폐화된 캠퍼스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샌디매니어니즘의 성공 

슬프게도 신-샌디매니어니즘은 기독교 안에 침투하여 구원에 대한 성경적인 교리들을 축소시키는 일에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처럼 교회의 침체가 뚜렷한 상황에서도, 이러한 잘못된 방법을 우리는 여전히 보고 있습니다. 믿음에 있어서의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성경 구절들과 타락한 인간의 사고와 성경적 교리들에 대한 오해들을 뒤섞어서 사람들을 잘못된 구원으로 이끌어 왔습니다.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자판기(영접 기도)를 통해서 꺼낼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그러나 이 과정을 통과해서 신실한 교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교인들이 있음은,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지, 이 자판기의 통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방법은 성경 구절을 사용하여 부드럽고 신속하고 편리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때문에, 심지어 건전한 기독교인들도 이것의 비성경적 특징을 깨닫지 못하며, 성경적인 고찰 없이, 친절하고 달콤한 방법으로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방법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파헤친 것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신-샌디매니안들은 그들이 진짜 그런지를 깨닫든지 그렇지 않든지, 인간의 결정을 통한 사람이 만든 믿음에 의해 사람이 만든 구원을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해 왔습니다. 그리고 비록 이 방법이 지적인 동의로는 구원을 얻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감정을 믿음의 열매로만 취급하고 믿음의 요소로 이해하지 않음으로 역설적으로 지적인 결정주의를 강화해 왔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인간에게 구원받는 믿음을 줄 수 있는 유일하신 성령님의 장엄한 역사를 감추어 버린 결과입니다. 

또한 이것은 성령님이 주시는 믿음 안에 있는 참 감정의 요소를 부인함으로 인간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부추기는 기교적 감정주의 및 탈신학과 탈교리에 기반을 둔 뜨거움이라는 또 다른 변형체의 양산에도 도움을 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잉글랜드의 유명한 성경 주석가이자 목회자였던 매튜 헨리 (Mathew Henry, 1662~1714)는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가 기독교에 대한 진지한 고백과 조화되지 않는 것처럼, 성령님에 대한 무지도 그러하다'라고 사도행전 19장 1~7절의 주석에서 밝혔습니다. 따라서 신-샌디매니어니즘은 이것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든지 그렇지 않든지 본질적인 면에서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함이 타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 

우리의 옛길에서 우리는 선물로서 성령님에 의해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구원받는 믿음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부패와 사탄의 속임수로 인하여 성경의 진리를 읽고, 생각하고, 설교하는 능력을 잃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반쪽 진리의 전파에 의해 만들어진 달콤한 하나님과 인간의 결정에 의해 태어난 신-샌디매니어니즘이 결합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에 관한 큰 오해를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신학을 파괴시켰으며, 실제적으로 선택, 소명, 회개, 칭의, 중생, 양자됨, 성화, 견인, 영화와 같은 건전한 교리들의 유기적 연결을 현대 교회 안에서 해체시켜 버렸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복음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현대의 탈신학화된 교회들은 세상을 바꿀 힘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합니다. 복음의 회복이 없이는 북한 선교를 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은 북한에 잘못된 복음을 가지고 들어가고자 합니까."인데, 이것은 복음의 회복의 절대적 필요를 반영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당신은 북한 선교가 당신 자신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인데, 이것은 부흥의 전적인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부흥은 복음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리되어질 수 없습니다. 즉, 잘못된 복음은 잘못된 부흥을 낳고,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신학의 기초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의 회복은 한국교회의 부흥으로 인도할 것이고, 북한으로 복음을 전하고 통일을 위해 잘 준비된 상태로 이끌 것입니다. 종합해 볼 때 북한 선교와 통일 준비에 있어서의 가장 큰 필요는 성경으로 돌아감으로 복음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거대한 싸움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첫째, 우리는 성경적인 복음 전도 책자를 만들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진정한 복음의 특징을 깨닫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둘째,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하신 분,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도록 성경으로 돌아가도록 사람들을 격려합니다. 그러나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은 단순히 읽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묵상, 성경 전체로부터 주요 주제를 붙잡는 것, 우리 자신을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경적인 방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을 포함합니다. 

무엇보다도 설교자에게 있어서는 진정한 복음 설교로의 회귀가 요구되어집니다. 복음 설교가 어떤 형태의 것인지 모르는 설교자라면, 배우고 공부하고 기도하십시오. 아마도 당신은 중생하지도 않은 채, 설교자로 서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신학자라면 신학생들에게 옛 방식의 복음 설교가 어떤 것이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진정 필요한 콘퍼런스나 세미나가 있다면 그것은 복음 설교가 어떤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뿐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이에 대한 세미나는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셋째,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난 것에 대하여 회개합니다. 그리고 부흥을 위해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부흥에서 오는 힘을 통해서 북한 선교와 통일을 위해 한국교회가 전체적으로 준비되어질 수 있다고 믿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거룩한 나라가 되어 참 복음을 다른 나라에도 더 많이 전달할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글을 맺으며 

독자들이여,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보다도, 더 장엄하고, 엄숙하며, 영광스러운, 그럼으로 이보다 더 큰 기적은 존재할 수 없는, 타락한 죄인을 중생시켜서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를 지금 이 시대보다 더 가볍고 인위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적이 있었습니까. 지금 기적이니 예언이니 떠들어대는 것들은 다 무엇 때문입니까. 영광스럽고 가장 큰 기적에 대한 무지함과 망각에서 기인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에서 말미암는 것입니까. 

독자들이여, 이제 우리가 이 글을 읽고도, 회개하지 않거나 개혁과 신학의 회복을 위해 나서는 일에 주저한다면, 과연 우리가 개혁주의 신학자 혹은 신자라거나 진정한 복음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신학자라면, 선교 단체의 리더라면, 목회자라면, 지금 사영리와 전도 폭발과 같은 유의 가르침을 펴서 읽고 조사해 보십시오. 우리의 참 현실이 이와 같이 처참한대도, 실제적인 개혁을 위해 주저한다면 과연 우리가 진정한 바리새인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말로만 외치고 기도만 하는 '부흥주의'를 언제까지 우리가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인용 및 참고 

1. D. Martyn Lloyd-Jones commented about Sandemanianism. 


2. 런던신학교 (London Theological Seminary) 학장으로 재직 중인 로버트 스트리벤스 목사님이 쓴 “Sandemanianism Then and Now” (by Rev Robert Strivens, 2004, The Westminster Conference) 과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쓴 “Sandemanianism” (D. Martyn Lloyd-Jones (1967, The Puritan Conference) 이 포함된 소책자를 다음의 웹에서 각각 구입할 수 있습니다. http://www.westminsterconference.org.uk/ (Rev John Harris, jfharris@ntlworld.com



6. 사영리는 다음의 웹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jesuswho.org/korean/four.htm http://www.jesuswho.org/korean/nowthat.htm&nbsp;

7. 이 원고는 다음의 글과 연결되어 있으며, 구글 검색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영리 수정에 대한 제안, 사영리 수정에 대한 제안-2, 한국교회의 지금, 그리고 부흥을 위한 개혁-1, 한국교회의 지금, 그리고 부흥을 위한 개혁-2 

8. 이 원고는 원래의 영문 칼럼 "The utmost need for recovery of theology: The impact of neo-Sandemanianism on modern churches" (www.herat4nk.org 2010년 9월 원고) 에서 보완, 수정한 것입니다. 2004년도에 샌디매니어니즘에 대한 글을 발표했던 로버트 스트리벤스 (Robert Strivens) 목사님은 신-샌디매니어니즘에 대한 글의 타당함을 언급하면서, '성령님의 권능 안에서 복음을 설교할 때에 수반되는, 성령님께서 부여하시는 진정한 죄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나오는, 참되고, 마음을 깨뜨리는 회개가 근본적으로 필요함을 믿는다'라고 의견을 표했습니다. (For my part, I believe that what is needed, at root, is real, heart-felt repentance following from a true Spirit-given conviction of sin brought on by preaching the gospel in the power of the Spir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