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글과 자료

믿음의 글/자료 게시판은 이 시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현대 기독교와 교회의 모습, 창조주 하나님과 그 분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게시판입니다. 특히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으로 우리의 주가 되시는지 그 표적인 부활의 역사적 증거 자료와 함께 흔들릴 수 없는 부활신앙에 서도록 격려하고 북돋우는 도움의 글들을 올리고 있습니다. 교우들의 많은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Title"마르는 교회와 자라는 교회"(마캐복음 21장 18-22절)-석기현 목사2006-10-15 11:4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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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경향의 강단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6)
(2006년 1월 29일 / 주일 대예배)

"마르는 교회와 자라는 교회"
마태복음 21장 18-22절
석기현 목사
우리는 주변에서 문을 닫게 되는 교회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물론 참으로 안타까운 일에는 틀림없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는 개척교회로 시작되었다가 끝내 자립조차 하지 못하고 끝나는 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큰 교회로 성장하고 아름다운 성전 건물까지 지어 놓은 후에, 어떻게 점점 사양길에 들어서면서 나중에는 텅 빈 교회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직접 가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특히 유럽에 있는 교회들의 대부분이 바로 그와 같은 종말을 보고 있는 것은 실로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 좋은 질문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역사상 문을 닫게 된 교회 중에서 가장 큰 교회는 어느 것이겠습니까?
  많은 교인들이 모여 들고 정기적으로 큰 예배들이 드려지고 게다가 웅대하고 아름다운 성전 건물까지 지어 놓았던 교회 가운데 끝내 문을 닫게 되었던 가장 큰 교회가 과연 어느 교회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예루살렘성전을 중심으로 모였던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교회가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예루살렘성전에는 '교회'라는 간판은 없었지만,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였던 성회였으니 신약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의 교회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예루살렘성전은 외적으로만 볼 때에는 그야말로 초대형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에 거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요한 절기가 되면 전국으로부터, 아니 저 멀리 각 이방 지역의 모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까지 모여서 제사를 드렸던, 엄청난 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46년이나 걸려서 재건된 그 성전의 장엄하고 화려함 또한 두말할 필요 없이 당대 최고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처럼 건물로 보나 등록교인 수자로 보나 당대 최대의 교회였던 그 예루살렘 성전은 그 어느 때부터인지 갑자기 사양길에 들어서게 되었고 내는 문을 닫는 정도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분명히 구약 시대에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고 제사를 받으시고 기도를 들으시던 그 거룩한 예루살렘성전을 하나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그렇게 끝나게 만드셨겠습니까?
  바로 그 대답을 우리는 오늘의 본문의 말씀, 예수님께서 수난주간 중에 행하신 한 사건을 통하여 찾을 수 있습니다.
  과연 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예루살렘성전을 문 닫게 하시고, 그 대신 신약 시대의 새 예루살렘교회를 성장시키셨습니까?
  오늘도 주님께서는 과연 어떤 교회를 마르게 하시고 어떤 교회는 자라게 하고 계시는지, 주신 말씀을 통하여 이 시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회는 곧 마르게 됩니다.
  이것이 제사장들의 예루살렘성전과 사도들의 예루살렘교회의 대표적인 차이점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미 예루살렘성전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쓸모없는 껍데기 교회로 변모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18절과 19절이 지적해 주고 있는 사실입니다.
  거기에 기록되기를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고 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신 예수님께서는 그 전날 저녁에 식사도 못하시고 주무셨는지 혹은 새벽 일찍 길을 떠나신 까닭인지 하여튼 시장기를 느끼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자 말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무상간이음식점 같은 것을 만나신 격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일 년에 두 번 열매 맺는 시기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시기는 잎이 자라기 전이나 잎이 무성할 때인데, 이때는 설익은 열매가 맺히게 되며 이 과실은 상품적인 가치는 없고 그저 정말로 배고픈 사람이나 따먹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시기는 그 같은 설익은 열매와 잎이 떨어지고 난 후인데, 이때에는 정말 맛있는 무화과 열매가 맺힌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대하고 다가가셨던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했으므로 이 사건은 그 전자, 즉 설익은 열매가 잎과 함께 열리는 시기에 해당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에서는, '이 때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라고, 즉 진짜 열매가 맺히는 시기는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매우 시장하셨던 우리 주님께서는 그 설익고 맛없는 열매라도 좀 얻고자 하여 그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 곁으로 가셨습니다. 하지만 그 무화과나무에는 그것조차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천만뜻밖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라고 그 나무를 저주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일 수 있습니다.
  이런 장면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 예수님은 우선 무화과나무에 잎이 무성한 것만 보고 속으실 정도로 무지했으며 아직 제철도 아닌데 나무에 과일이 맺히지 않았다고 화를 내실만큼 자제력이 결핍된 성격의 소유자로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그 같은 추리는 전적으로 부당한 것입니다.
  예수님 같이 전지(全知)하시면서도 완전한 인격의 소유자 되신 분께서, 과일나무 하나의 상태도 파악 못하시고 더구나 무슨 원수처럼 여기며 저주를 발하실 분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왜 주님께서는 그와 같은 일을 행하셨습니까?
  이 의문은 우리 주님의 그 같은 언행을 하나의 '의도적인 상징 행위'로 이해할 때 금세 풀리게 됩니다.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도 어떠한 진리를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깨우치게 해 주시기 위하여 상징적인 행위를 몇 차례 행하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로 앞에 나타나는 사건,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그 행위도 예수님 자신이 '군주와 같은 정복자로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겸손히 섬기는 종으로서의 메시아'로 오신 것을 상징하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행위를 통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그 어떤 중대한 사실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진리가 과연 무엇입니까?
  구약에 보면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그와 같은 행위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이란 것이 하나님의 정말 원하시는 진실한 신행일치의 열매를 하나도 맺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예루살렘성전과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생활이란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될 뿐인 것을 제자들에게 명백하게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저주의 예언 그대로 예루살렘성전은 주후 70년경에 로마 군대에 의하여 철저히 파괴되어 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무화과나무 사건을 통하여, 그 예루살렘성전 중심의 이스라엘교회가 이미 하나님의 버리신바 되었고 곧 말라 죽게 될 날만 남아 있음을 모든 사람의 눈에 생생한 입체영상으로 예언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된 주된 이유는 그들에게 열매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이란 것은, 비록 여전히 예루살렘성전에 정기적으로 모이기도 하고 예물을 바치면서 제사도 드리고 있었지만,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위의 열매는 전혀 생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꼭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주관해 나가시는 이 복음 사역에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회는 그 옛날 예루살렘성전과 마찬가지로 결국 마를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마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찍어 불어 던지움'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예수님께서 좀 원하시는 일이 있으실 때 그 일에 쓰임 받을만한 신자가 되어가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으로부터 어떤 열매를 원하실 때 정 안 되면 좀 설익은 것이라도 일단 내놓을 만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신앙 경력이 좀 짧아서 아직 충실한 열매를 내 놓지 못한다 하더라고 최소한 설익은 것이라도 열매는 있어야 합니다.
  내가 좀 가난하다 하더라고 예수님께서 그 가운데서 원하시는 정도의 작은 열매는 맺힐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열매를 못 맺지만 앞으로 더 자라게 되면 풍성하게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변명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 교회에서 좀 더 다니고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 있게 되면 그때 가서는 좀 열매도 내어 놓겠다고 마음대로 계산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신앙 연륜이 짧은 것이나 능력이 약한 것 따위를 핑계로 삼아 설익은 열매조차 내놓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 다음에는 실로 두려운 결과가 따라 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초기에 설익은 열매조차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제때가 될 때 잘 익은 열매를 내어놓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업을 하면서도 장사 안 되는 상점이라면 일찍 문 닫는 것이 더 낫고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지점이라면 프랜차이즈 권리를 회수하고 폐점시키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무 열매가 없는 기업에 돈과 인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같은 체인스토어의 간판을 걸어 놓게 하는 것조차 그 전체 프랜차이즈에 오히려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운영하시는 방법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야 할 전도와 선교 사역에 아무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교회, 오히려 교회라는 이름 달아놓고 있는 자체가 불명예스러운 교회를 남겨 두실 이유가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교회에 처음 오시는 성도님들 중에 이 교회에 예배 시간들 외에도 온갖 봉사들을 위하여 모이는 시간들이 왜 그리 많은지 처음부터 아예 질리게(?) 되는 분들이 혹 계십니까?
  이 경향교회에는 십일조와 감사헌금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신학교와 선교회와 별들의 후원회 등 왜 이리 많은 종류의 헌금들이 있나 하고 지레 겁을 집어먹고(?) 등록하기를 꺼려하는 분들도 혹 계십니까?
  제발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열매를 엄청나게 많이 맺는 교회를 바로 찾아왔구나.'라고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갓 시작했든지 오래 되었든지, 이 교회에 처음 오셨든지 아니면 개척 때부터 지금까지 섬겨 오셨든지 간에, 우리 모두는 반드시 주님 앞에 각자의 열매를 내어놓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로 지금 제때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앞으로는 영원히 아무 것도 내지 못하고 바짝 말라 죽을 날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현재의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든지 간에, 크든지 작든지, 익었던지 설익었던지 간에, 하여튼 자기 자신의 열매를 맺고 주님께 바쳐드림으로써, 교회의 주인 되신 우리 예수님께서 앞으로도 우리교회에 더욱 말씀으로 거름 주시고 성령으로 물을 주시는 가운데 결코 마르지 않고 더욱 싱싱하게 함께 자라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면서 기도드리는 교회는 반드시 자라게 됩니다.
  믿음과 기도, 바로 이것이 서서히 마르다가 결국 문 닫게 된 예루살렘성전과 지금 막 문 열고 개척되었는데도 순식간에 크게 성장하게 된 예루살렘교회의 또 하나의 큰 차이점이었습니다.
  이어지는 20절부터 22절에 기록하기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에 그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 것은 제자들의 눈에도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여기 "곧"이라고 번역된 말은 엄밀히 말하자면 24시간이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에 보면 "다음날 아침"에 그 나무가 마른 것을 제자들이 보았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은 연대적으로 자세히 기술했고 마태복음은 같은 주제의 사건을 묶어서 일목요연하게 기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제까지 잎이 무성하던 나무 한 그루가 하루 만에 말라죽어 버린 것 역시 "곧"이라고 말해도 무방한, 실로 놀라운 기적임에는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요령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즉 "너희들도 의심치 않는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에 근거한 기도만 드리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대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이 산더러" 즉 바로 예루살렘 동편에 보이는 감람산더러 "바다에" 즉 사해에 던져지라고 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감람산에서는 사해가 보이는 까닭에 그런 비유를 쓰셨던 것이며, 이 말씀은 사람의 눈에는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가능하게 나타날 때를 가리키는 과장법적인 표현으로서 결코 문자적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그 같은 '믿음과 기도'가 바로 구 예루살렘성전과 신 예수살렘교회 사이의 엄청난 차이점이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로 믿지 않았습니다.
  기도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은커녕 그 기도의 기초가 될 믿음에서부터 이미 결정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기도한다고 해도 거기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인하여, 신약 교회에 주어졌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는' 특권을 전혀 누리지 못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새 예루살렘 개척교회는 달랐습니다.
  거기에는 화려한 예배당도 없었고 아름다운 예복을 입은 제사장도 없었지만,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바른 신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참된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바로 그 교회의 반석, 즉 초석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예루살렘교회는 모이는 첫 시간부터 모든 교인들이 성령 받기를 위하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그때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교회 내에서 발생한 문제 해결을 위하여서도 일단 기도했고, 누가 잡혀 가거나 교회가 핍박을 당하면 더욱 기도에 힘쓰는 등, 무슨 일이 생기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부터 드렸던 교회였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약속하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었으니, 기도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만사해결책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정말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예언 그대로 되어갔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실제로 가능하게 나타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하루에도 삼천 명이 등록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앉은뱅이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사도의 옷깃만 스쳐도 악귀가 떠나갔으며, 죽었던 과부와 청년이 사도의 기도를 받고 부활하기도 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일들을 기록하다 하다가 끝내 다 기록할 수 없어서, "사도들이 민간에 표적과 기사를 수없이 행했다"라고 요약 정리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오직 믿음과 기도로 출발했던 예루살렘 개척교회는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는" 급성장일로로 치닫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지 못했던 예루살렘성전은 점점 더 말라가고 끝내는 '찍혀 불에 던져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의 교회들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믿음 자체부터가 안 되어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독생자로, 참된 그리스도로, 장차 다시 오실 심판주로 믿는 이 믿음에서부터 아예 문제가 있는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단 전체적으로 쇠약해 가거나 큰 교회였는데도 문을 닫게 되는 경우 거의 예외가 없이 바로 이 경우에 속합니다.
  미국의 큰 교단들이 파송했던 선교사를 도로 소환해 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약해지고, 유럽의 큰 교회들이 교인은 하나도 없고 그저 관광객들만 들리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어서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참된 신앙을 놓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믿음은 있지만 기도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신앙은 바로 배웠지만 그 신앙을 체험적인 생활로 옮길 결단력과 열심이 약한 교회는 바로 기도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는 그래도 믿음 없는 교회보다야 조금 더 오래 가겠지만 결국은 역시 마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그 믿음이라는 것이 행함과 일치가 될 길이 없고, 그렇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선택은 단 한 가지, 믿음과 함께 기도를 동반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저 믿음과 행위, 즉 신행일치만 강조하면 될 것 같은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 사이에 기도라는 것을 첨가하고 계시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기도야말로 이미 얻은 믿음을 더욱 튼튼하게 성장시키는 보약과도 같은 것이며 그 믿음대로 행하며 살 수 있는 활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기도가 있어야 믿음과 행위 역시 건강하고 건전하게 유지되며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당장 교인 수자가 급히 느는 것보다는 우선 바른 믿음이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바른 복음이 선포되어야만 합니다.
  그처럼 말씀에 근거한 믿음에 세워진 교회가 더욱 알차게 자라기 위해서는 경상비보다도 우선 교인들의 기도가 풍성하게 넘쳐나야만 합니다. 늘 말씀을 통하여 바른 믿음을 지킴으로써 이 교회의 최고 자산을 함께 더욱 늘려 나가고, 모여서 합심으로 드리는 기도와 '골방'에서 개인적인 기도를 통하여 이 교회를 돌리는 윤활유와 원동력을 함께 끊임없이 제공함으로써, '믿고 구하는 것'들을 다 받을 뿐 아니라 '산을 옮기는' 큰일들까지 해 낼 수 있는 교회로 함께 자라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아주 다른 두 교회들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구 예루살렘성전에는 최고의 신학 학위를 가진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기술과 디자인으로 건축된 훌륭한 건물도 있었습니다.
  차고 넘칠 정도로 교인 수도 많았으며, 본국은 물론 이방에까지 퍼진 명성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교회 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예루살렘성전이었고, 그것이 곧 문 닫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 이름으로 기도할 줄 모르고 그 결과 아무 열매도 없던 그 예루살렘성전은 주님의 저주대로 곧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오히려 그들에게서 핍박 받던 소수의 사람들이 다락방에서 비좁게 모여 시작했던 예루살렘교회에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믿는 바른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 흔들릴 수 없는 기반 위에 기도가 힘을 발휘하게 되었고 곧 놀라운 이적의 열매들이 끊임없이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루살렘성전이 폐허가 되던 날 이 예루살렘교회는 오히려 전 유대뿐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끝을 향하여 급속도로 확장해 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큰 교회라고 망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절대로 없습니다.
  크고 화려한 건물만 무슨 뼈다귀처럼 남겨진 교회, 복음 선교의 사명 수행은커녕 교인들의 주일예배조차 없는 교회, 관광명소로는 유명해졌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에서는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교회 - 그런 교회당 안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은 마치 무슨 무덤 안에 들어온 기분일 것 같지 않습니까?
  속에 믿음이 자리 잡지 않고 기도가 식어버리고 열매가 생산되지 않았던 교회들은, 예루살렘성전과 같이 서서히 말라가는 '나무'나 이미 바짝 바른 '풀이나 짚'과 같이 간단히 '불타 없어질 공력'으로 간신히 모양만 갖추고 세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경향교회는 지난 32년 내내 자라만 왔고 특히 강서성전 헌당 이후부터는 급속도의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창립일은 있었지만 교회 문 닫는 날은 결코 생기지 않고, 예수님 재림하시는 그날 그 시간까지 계속 자라나는 교회가 될 것을 확신하면서 기도합니다.
  강단에서 신앙 진리가 바로 선포되어지고, 성도 개인의 경건생활이 더욱 뜨겁게 타오르고,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구속사의 굵직굵직한 열매들을 계속 생산해 내는 한에는, 이 교회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교회를 자라고, 자라고, 또 자라게 해 주실 것이기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3천에서 시작하여 3만을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이미 성취되었고, 이제 '3.3.3.' 운동의 마지막 단계인 30만만 바라보고 있는데 어쩌면 이 목표도 너무 적게 잡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 자란다면 한 300만에서 3000천 만 정도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중국 선교만 제대로 성취된다 해도 3억도 아주 간단한 수자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크게 자라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는 이 믿음부터 철저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기도 없이는 자신의 신앙과 행위를 서로 튼튼히 연결시켜 줄 것이 아무 연결고리가 없으며, 기도 없이는 이 큰 가족이 한 마음, 같은 보조로 뭉칠 길이 없는 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통하여 바로 현재 우리 각자에게 주어져 있는 봉사와 충성의 기회들을 소중히 여기고 꼭 합당한 열매들을 맺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 다 함께 이처럼 개인적으로는 더욱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성화의 성장을 이루면서, 물가에 깊이 뿌리박힌 둥치에 늘 푸르고 싱싱하고 열매를 많이 맺는 가지들로 붙어서, 함께 더욱 무성하게 자라나는 교회를 세우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