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글과 자료

믿음의 글/자료 게시판은 이 시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현대 기독교와 교회의 모습, 창조주 하나님과 그 분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게시판입니다. 특히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으로 우리의 주가 되시는지 그 표적인 부활의 역사적 증거 자료와 함께 흔들릴 수 없는 부활신앙에 서도록 격려하고 북돋우는 도움의 글들을 올리고 있습니다. 교우들의 많은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Title한국교회의 지금 그리고 부흥을 위한 개혁 - 92012-07-12 14:5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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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지금 그리고 부흥을 위한 개혁  -  9
: 하나님께서는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으신가? – 어리석은 질문


북한사랑 PN4N 2011년 4월호 

글: 이스데반 


 

들어가며

얼마 전 잉글랜드에서 부흥을 연구하는 한 친구로부터 아래와 같은 전자우편을 받았습니다. 제목은 ‘한 나라가 변화될 수 있는가?’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튀니지아와 이집트 그리고 다른 억압적인 아랍세계의 국가들에 대한 소식들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봉기가 한 정부를 무너지게 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집트는 단지 사람들이 18일 동안만 힘을 발휘했을 뿐이죠. 물론 세계 전 지역과 이집트 내부에서 기도의 손길이 있었음을 믿습니다. 아무튼 이것은 특별히 북한과 관련해서 볼 때 고무적인 것입니다. 힘을 얻읍시다. 한 나라가 하루아침에 태어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1949년에 그런 경우였습니다. 북한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주님이 곧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회신을 했습니다. ‘북한은 이들 나라와는 사뭇 사정이 다르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북한은 변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때, 여기서 변화가 급작스럽고 큰 변화 내지 정권의 붕괴 같은 것을 의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조만간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면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조만간에 갑작스런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현실적인 상황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면 누가 알 수 있겠는가라는 답변은 어떠한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님께서는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으신가?’라고 바꾸어 말한다면 어떻습니까? 이것은 매우 우매한 질문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전능한 하나님께 불가능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초점을 하나님께 둘 때 북한은 반드시 변화될 것이라는 한가지 대답만 가능하며, 그러나 그 시간은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을 덧붙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히 북한을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오직 하나님만이 정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는 유일한 답변입니다. 

이 답변이 주는 의미는 매우 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때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이라도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긴박성이 북한선교와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자세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항상 준비되어 있어서, 언제든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그에 맞게 일할 채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가지 질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북한을 위해 기도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북한과 통일에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된 한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온 천하에 더 널리 보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함입니다. 북한에 복음이 전파되고, 택하신 자녀들을 불러내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세계 열방에 특별히 무슬림과 같은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줄여서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때문입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종된 복음

이제 분명해 진 것입니다. 북한을 위한 기도운동은 복음운동이며, 말씀운동입니다. 그것은 신학회복 운동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회복운동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고, 그 정도만큼만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북한선교와 통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말씀을 알고 복음을 알아야 하며,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를 또한 알아야 합니다. 실로 북한의 문이 열리면 우리에게는 엄청난 기회들이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기회들 말입니다. 제가 염려하는 그리고 매우 심각하게 고민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가 지금 복음을 제대로 인식하고 실천하고 있지 않는 이 상황에서 이 거대한 기회를 어떻게 맞이하게 될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만일 ‘영접기도 통과 후 하나님 자녀됨 선포식’과 같은 인스턴트식 인위적 복음 전도법을 가지고 들어가게 된다면, 실로 이것은 큰 재앙이 될 것입니다. 

2000년도 이후로 교회 안에서 뚜렷해진 것이 있다면, 영접기도 통과식 전도법의 왕성한 성장과 중생의 결과로 주어지는 믿음의 교리의 현저한 쇠퇴, 캠퍼스의 황폐함과 교회내부의 끊이지 않는 놀라울 정도의 타락입니다. 이전에는 비단 개혁교회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전체적으로도 구원의 교리와 복음전도와 설교에서 ‘중생’이 차지하는 위치는 독보적인 것이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언급을 여기서 잠깐 인용해 볼까 합니다.

복음주의가 가지는 특성은 중생을 대단히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거듭나는 일이 복음주의자에게 절대적인 토대입니다. 그는 죽은 정통이나 개신교 스콜라주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대단히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주의자는 중생을 강조합니다. 성령으로 태어나 새로운 시작을 영위하고, 그리스도안에서 새생명을 얻으며, 신적 본성에 참여한 자가 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갈수록 중생을 강조하지 않게 되고, 개인의 의지와 결단의 행위를 더욱 강조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주의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일어나는 중생의 잣대로 바라봅니다. 복음주의자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마틴 로이드 존스, 복있는 사람, p. 85-86)
 

오늘날에는 복음주의라는 것 자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목사님들과 신학자들의 탄식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신학의 실종’이라고 얘기하는 신학자의 탄식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무엇 때문에 믿음의 교리에서 추락하여, 타락한 교회 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푯대를 잃어버린 것 처럼, 말로만 회개를 외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성경의 복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이해함

여기서 우리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움을 입기 위해 루터의 가르침을 살펴보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루터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 또는 참 믿음은 생기 넘치는 또는 살아있는 믿음 (fides viva) 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믿음은 세가지 별개의 그러나 연결된 측면 또는 요소들로 구성된 것으로 이해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삼중적 정의는 notitia, asensus, 그리고 fiducia 로 불리는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신약성경에서 믿음을 말하는 주요 방식을 포착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1. Notitia. 믿음의 측면 중 notitia (또는 notae)는 마음에 의해 파악되는 믿음의 내용물을 의미한다. 비록 믿음은 지식과 동일하지 않지만, 믿음은 결코 지식을 배제하지 않는다. 믿음은 진공상태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다”라고 할 때, 우리가 믿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구원되기 위해서는 사람은 무언가 기초적인 정보를 믿어야 한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 이상을 포함하지 결코 그 이하는 아니다. 복음에는 기본적인 내용물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 사람, 인격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정보, 어떻게 그리스도의 구속이 적용 되는지와 같은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인식해야 하는 것들을 포함한다.

2. Assensus. 믿음의 측면 중 assensus는 데이터의 진실성 혹은 복음의 내용물에 대한 지적인 동의를 말한다. 조지 와싱턴 (George Washington)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었음을 믿는 것은 우리가 그 진술을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복음이 참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가질 수 없다.

믿음에 있어서 assensus의 단계가 결단의 문제가 아님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내 마음이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언가를 믿기로 “결정”할 수 없다. 무언가 의문시 되는 것을 참이라고 “희망”할 수 있고, 그 희망에 따라 행동할 수도 있다. 나는 어거스틴이 조건적인 가정에 따라 단계를 밟아가는 조건적인 믿음이라고 불렀던 것을 훈련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결단에 의해 진리를 실제적으로 확신하는 일은 할 수 없다. 진정한 동의가 없는 “믿음”은 경솔한 믿음이거나 미신이다.

3. Fiducia. 구원에 이르는 세 번째 요소는 개인적인 신뢰와 연관된다. 이것은 보통 인식적 또는 순수한 지적 요소에 부가되는 무언가에 관련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인간의 반응에 있어서 의지적 그리고 감정적 요소들과 관련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달콤함과 특출함에 대한 지적이고 인식적인 자각을 포함한다. 이것은 중생에 의해 이루어지는 우리 안의 변화와 관련된다. 이 변화는 감정, 기질, 기호, 그리고 의지의 변화를 포함한다. 이제서야 우리는 그리스도를 선택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품는다. 우리는 기쁘게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진실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달려간다. 종교개혁의 신학은 (특별히 오직 은혜의 신학, sola gratia) 죄인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중생이 믿음에 앞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세 요소 – notitia, assensus, 그리고 fiducia – 는 분리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는 칭의를 위한 충분한 조건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함께 더해지면, 그들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본질을 구성하게 되고 하나님의 칭의의 선포가 믿는 사람에게 적용되도록 하는 유일한 충분 조건이 된다.
(Justified by faith alone, R. C. Sproul, Crossway Books, p. 48-50)

오늘날의 대중전도에서 영접기도로 이끄는 과정을 본다면, 대부분 assensus의 차원에서, 전달한 내용을 지적으로 인식하고 동의를 이끌어 내는 과정까지는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생략된 체 영접기도로 직행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모 단체에서는 모 방법으로 몇 천명이 기도하고 결신했다는 전도사역보고를 하는 것을 지금도 쉽게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는 중생을 통한 믿음은 현대교회에서는 매우 생소한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영접기도가 차지한 체 물러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전도자가 전도자에게 복음을 전할 수는 있지만 믿음을 주입할 수는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영접기도를 통과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말함으로써, 영접기도를 통한 믿음의 주입을 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모순에 처한 우리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 가장 긴급히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오, 형제 자매님들이여! 북한선교와 통일운동은 복음운동임을 우리는 간파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복음이 어떤 것이며, 성경의 복음과 동일한 것인지 검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을 전하거나, 성경의 복음을 잘못 전달하고 있는 이 상황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북한선교라는 것은 다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먼저 자신에게 중생한 신자인지 자문해 보십시오. 그리고 옆 사람에게 ‘당신은 중생하셨습니까?’ 라고 질문해 보십시오. 우리는 먼저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통일 이후에 북한 주민들을 위한 모든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필요를 돕고자 하는 단체들이 종교와 이념을 넘어서 무수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심지어 이단들도 이런 일에 열심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말할 것도 없이 이 모든 필요에 합당하게 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영생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들이 그 복음을 듣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북한선교를 위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학자, 의사, 연구원, 사회운동가, 긴급구호전문가, 법률가, 정치인, 기술자, 과학자, 기업경영인, 예술가 등 모든 분야에서 모든 사람들이 북한선교와 통일을 위해 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선교와 통일의 궁극적 지향점을 고려할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복음 전문가’들입니다. 


복음전문가는 이러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남은 삶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헌신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고 두루 읽고 깨닫기 위해 애쓰는 사람입니다. 구원의 교리들에 대한 성경적 지식을 갖추고 있고 이것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설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말이나 생각이나 경험은 감추고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장엄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중생한 자의 표식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복음만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하늘의 소망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 소망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충만한 수가 채워지기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기꺼이 이러한 신적인 훈련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깨뜨리고, 그리하여 북한으로 올라가 이러한 삶을 살아냄으로 하나님의 빛을 드러낼 때, 흑암의 땅에 진정한 평화와 안식이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준비되어져야만 하며, 가장 시급하고도 긴급한 필요는 바로 복음을 알고 체득화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 자신에게 진지하게 자문해 봅시다. 나의 믿음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믿음입니까? 나는 중생하였습니까? 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나의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입니까? 나는 과연 이런 믿음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있습니까? 세상사람들이 나는 세상과는 다르다고 확실하게 인정을 해 주고 있습니까? 내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과연 무슨 의미입니까? 나의 남아 있는 삶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기도운동과 복음운동

이제 기도운동에 대해서 간단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진정한 기도에는 실천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부흥이 없이는 통일로 가는 동력을 얻을 수 없고, 부흥은 회개에서 시작하므로, 우리는 자신을 살피며 회개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이미 여러 번 언급해 온 것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복음운동과 함께’라는 관점에서 고찰해 봅시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운동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복음이 없어도 기도할 수 있습니까?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없는 기도는 공허한 기도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기도에 생기를 부여하고, 살아있게 만듭니다. 따라서 기도운동은 복음운동과 떨어질 수 없으며, 기도운동이 가는 만큼 복음운동이 왕성해져야만 합니다. 


복음운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기초 또는 핵심과 믿음이라는 초자연적 은혜의 선물이 결합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분명하게 깨달아야 하며, 살아있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그것이 삶에서 확증되어져야 합니다. 만일 이것이 우리 안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기도운동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운동을 결집하여, 터뜨리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복음운동은 기도운동을 통해서 터뜨려지고, 복음운동이 다시 확산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기도운동은 복음운동에 추진력을 가하는 역할일 하는 셈입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중요한 점이 발생합니다. 과연 그 기도운동이 복음운동을 담고 있느냐는 점입니다. 만일 기도운동이 복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담고 있다면, 예를 들어, 긍정적인 사고의 유익성, 건강관리의 필요성, 도덕적인 삶의 가치, 행복한 결혼생활, 개인적인 체험, 뉴스브리핑, 열광주의와 같은 것을 담고 있다면, 문제가 커진다는 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축소되고 인간적인 삶의 풍요가 높아지는 결과를 부추기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운동 안에서 북한을 위한 기도나 통일준비에 대한 것들만을 집중해서 다루게 될 때, 우리가 강조해야 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느새 뒤로 밀려나는 것을 염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억 만 배 북한을 아끼고 염려하시며, 애타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더 깊이 가까이 나아가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야만 합니다. 이 일이 기도운동에서 절대적으로 우선적이어야 합니다. 기도운동에서 증거되는 설교나 메시지도 역시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높여지지 않는 기도운동을 우리는 결단코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 압도되었을 때에만, 진정한 회개와 진정한 영적 중보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글을 맺으며

하나님께서는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으신가? 이에 대한 답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고, 가장 긴급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지금과 같이 교회의 타락상이 심각하게 자주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성경의 복음과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중생’이라는 핵심교리의 잃어버림으로 인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불인식이 우리가 시급히 회복해야 할 점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고, 우리 인간의 처참함을 참회하게 하는 것에 우리의 모든 삶과 사역이 드려져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