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글과 자료

믿음의 글/자료 게시판은 이 시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현대 기독교와 교회의 모습, 창조주 하나님과 그 분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게시판입니다. 특히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으로 우리의 주가 되시는지 그 표적인 부활의 역사적 증거 자료와 함께 흔들릴 수 없는 부활신앙에 서도록 격려하고 북돋우는 도움의 글들을 올리고 있습니다. 교우들의 많은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Title학문과 복음, 은사와 성령2003-12-02 00: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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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결실은 언제나 잃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은 것은 복음의 결실이 아니라 복음의 방법이었죠.  복음이 전해진 결과가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인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무지한 죄인의 육적 필요를 채워 주심으로써 믿음을 주시고 생명으로 인도하실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병자들을 민망히(불쌍히) 여기셔서 병을 고치시고 죄사함을 선포하셨죠. 우리의 유한한 논리는 항상 이분법으로 치우치게 합니다. 학문은 도구이고 복음은 목적이기에 대립되는 두 개체가 아닙니다.  마치 '호미'와 '땅파기'가 서로 대립되지 않듯 말입니다.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한 이후로 인간의 모든 교육은 성령의 은사(spritual gift)와 상관없는 인본주의 교육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학문을 연마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이런 고민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은사와 소명의 측면에서 접근하면 답이 쉽게 나옵니다.   그러나 쉽게 나온 답을 선택하려면 믿음이 요구됩니다.  학업과 은사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죠.  이럴 땐 믿음으로 '호미'를 버리고 '삽'을 선택해햐 합니다.  호미질이 삽질보다 편하고 호미로 파도 땅은 파진다고 자위하기가 쉽습니다.  김성배 목사님이 믿음으로 '호미'대신 '삽'을 선택한 좋은 예가 되겠습니다.  호미질 때려 치우고 삽질한다고 해서 예전에 호미질 했던 것이 다 쓸모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호미질 했던 경험이 삽질하는데에도 유용하게 쓰입니다. 학문이야 말로 복음을 위한 훌륭한 도구이지만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히게 되면 오히려 나의 학문이 복음에 방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마치 포크레인이 땅을 펑펑 파내기 시작하면 삽질하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방해가 되듯 말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7-9) ------------------------- 박양주님이 남기신 글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기독교의 신앙은 논리적인 면에서 칼로 무를 베듯이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어 보자. 목사님 즐겨 사용하는 표현을 빌면,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을 포기해야, 즉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놓아 드려야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성취된다. 이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며, 자신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규정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측면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기둥도 있다. 하나님은 나와 당신, 바로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는 점이다. 이천년 기독교의 역사를 보라. 그 얼마나 많은 숭고한 피가 뿌려졌으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삶을 바쳐 헌신해 왔던가! 그들의 헌신과 투쟁 없이 과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가능했겠는가? 하나님은 나의 다리, 황금색 팔뚝, 펄떡이는 혈기… 를 통해 일하신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한… 하나님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신다. 내가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 그러나 나를 통해서만이 비로소 실천되는 사역… 이 두가지는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러나 통전적인 하나의 고백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다. 얼마 전 추수감사 예배 시간에 다루어졌던 본문도, 서로 상반된 두가지 진술이 함께 통합적으로 수용되어야만 하나로서의 온전한 전체를 이룰 수 있다는 측면에서 앞서의 것과 비슷한 사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한 앉은뱅이에게 베드로와 요한의 입을 통해서 복음이 선포되었다. 앉은뱅이는 돈을 구하였지만,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였다. 구걸하는 이는 빵을 구하였지만, 적선하는 이는 생명을 전하였다. 걸인은 유한한 육의 것을 소망하였지만, 주의 제자는 영원한 영의 것을 나누었다. 그렇다. 우리가 고백하는 복음은 이 유한한 세계에 매몰되어 그 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다. 선착장에서 썩은 고기라도 꿰어차고자 떼를 지어 몰려 다니는 갈매기들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선포된 복음이 아니다. 더 높이, 더 빠르게, 더 안정적으로 날고자 애쓰던 조나단의 높은 이상… 영적 소망을 담은 그런 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복음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복음의 역사는…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것으로 우리 앞에 드러난 것도 놓쳐서는 안될 지점이다. 걸인에게 전해진 복음의 역사는 그의 인지 과정에 영향을 미쳐서 사영리 마지막 단계에서 영접기도를 함께 따라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내 마음의 보좌를 그분에게 내어드리겠습니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마감되지 않은 것이다. 교회 등록으로 마무리되지 않았으며, 침례의 예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즉 복음의 역사는 회심과 개종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드러났다. 그는 일어나 걸었다!!! 평생 힘을 잃어 움직이지 않던 그의 다리 근육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결국에 썩어 없어질 우스운 것일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복음은 그런 우스운 것을 통해 그에게 역사하였다. 앉은뱅이에게 전해진 영원한 세계의 초월적 복음은 유한한 이곳의 육체적 결실로 열매맺은 것이다. 우리가 붙잡고 쫓아 가는 복음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며,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복음의 역사는 이 낮고 천한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성취된다. 예수의 오심과 고난 당하심,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의 섭리는 내가 발딛고 서 있는 이 땅의 하찮은 모습들을 넘어 서는 영원하고 초월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그 보잘 것 없는 물질의 세계를 통해서야 비로소 결실을 드러내는 그런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육의 세계는 복음이 가져다 주는 영원하고 아름다운 세계에 비추어 너무도 초라하고 불완전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통해서야 비로소 복음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는 소중하고 고귀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그분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역설은 오늘도 우리에게 참 쉽지 않은 통찰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계신다. 신이고자 한다면 인간의 몸을 입지나 말던지,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신이기를 포기하던지… 우리의 낮은 지성은 그 같은 도식을 요구하지만, 믿음의 선배들은 이 두가지 모두를 포괄하는 고백을 오늘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친지와 고향 땅을 떠나 이곳 먼 오스틴에까지 학문을 해 보겠노라 와 있는 내게도 복음은 또다시 도전한다. 나의 학문 세계에 매몰되지 않는 복음… 유한한 땅의 논리를 넘어서는 영원한 세계의 이야기… 그러나 그 유한한 학문의 세계를 통해 성육신하기를 기다리는 복음, 나의 학문함을 통해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복음… 오늘도 나와 많은 사람들은 또다시 고민에 빠진다. 복음의 메시지 앞에 정결하고 정직하게 선 자에게 과연 학문함은 무슨 의미를 가질 것인가? 회심과 개종을 유도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의 가치 이외에 과연 나의 학문함이 가질 수 있는 가치는 없는 것일까? 나는 이 질문에 직면하기 위해 앞서의 장황한 이야기들을 끌고 왔다. 가장 단순한 도식은 학문은 땅의 것, 복음은 하늘의 것… 전자를 포기하고 후자를 추구함이 되리라… 하지만… 단순과 명쾌 안에는 언제나 은밀한 유혹이 도사리고 있음을 잊어선 안된다. 대부분의 기독교의 고백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과연… 복음적 학문함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복음의 역사하는 힘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었듯이… 그 생명의 역사가 내 전공 교육학이라는 유한한 모습으로 현상하기를 소망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한 성도의 실천이 그의 풍성한 학문함으로 결실하는 것… 학문의 현장에 학문의 모습으로 부활하는 영원한 세계의 복음… 그를 소망하는 일… 학문과 복음… 그 이질적인 두 개체가 하나로 만날 수 있는 지점… 아마도 성육신의 비밀 어딘가에 숨겨져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들춰 본다.